1997년 4월 일본, 1909년 타이헤이(太平)생명부터 무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닛산(日産)생명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영업정지 명령이 내려지며, 울부짖는 가입자들과 굳게 닫힌 셔터 뒤로 몸을 숨긴 경영진의 모습은 일본 보험 잔혹사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버블 붕괴 이후 부실을 가리기 위해 분식에 가까운 회계적 유예 조치를 남발했으나, 이는 결국 거대한 파국을 늦춘 것에 불과했다. 닛산생명을 시작으로 토호생명, 다이치화재 등 보험사가 도미노처럼 쓰러졌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세금과 가입자의 눈물로 돌아갔다.
2026년 대한민국, 30년이 지난 우리는 놀랍게도 그 비극의 경로와 ‘평행이론’을 걷고 있다. 저금리 경제, 더딘 성장률, 규제 완화를 통한 ‘고통 늦추기’ 형태까지 판박이다. 일본이 겪었던 보험업의 유령이 지금 한국 보험 생태계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더 이상 지체하며 ‘골든타임’을 놓칠 수 없다. 이제는 일본을 교훈삼아 새로운 미래를 그려야 할 때다.
30년 전 일본 보헙업계를 뒤흔든 파국이 2026년 한국 보험업계에 잔혹한 평행이론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미지=더밸류뉴스]
◆ 금리 하락 기조…‘관리된 연착륙’ 뒤 숨은 부실
현재 국내 보험업계는 새로운 보험회계제도(IFRS17) 하에서 외형상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예정이율과 운용금리 간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차역마진’의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해 한국은행이 3.0%의 기준금리를 2.5%까지 인하하며 하락 기조가 뚜렷했다. 금리 하락으로 보험사들의 운용자산 수익률은 압박을 받았다. 반면 과거에 약속한 고정 금리는 변하지 않는 족쇄가 됐다. 지난해 6월 기준 보험업 평균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56배 수준에 머물며, 역마진 우려와 강화된 자본 규제 리스크로 저평가 국면에 갇혀 있다.
또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누적 기준 보험업계의 당기순이익은 11조2911억원(전년동기대비 -15%), 보험손익은 8조5871억원(전년동기대비 -30.1%)을 기록하며 수익성 악화가 두드러졌다. 금감원은 “손해율 악화가 보험부채 증가 등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손해율 관리 노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은 각종 규제 완화라는 ‘인공호흡기’로 당장의 리스크를 막고 있으나, 이는 본질적 치료가 아닌 부실의 발현을 뒤로 미루는 ‘관리된 연착륙’에 불과하다. 지난해 보험사들이 발행한 자본성 증권 규모는 8조8845억원으로 지급여력(K-ICS) 비율 준수 부담에 따른 행보를 보여준다. 특히 과거 고성장기에 경쟁적으로 판매했던 5~7%대 고금리 확정형 상품은 금리 하락기에 이차역마진을 심화시켜 보험사의 기초 체력을 갉아먹고 있다.
◆ 日 보험사 연쇄 파산 잔혹사…안일함이 불러온 생태계 붕괴
일본 보험업계는 지난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닛산생명, 토호(東邦)생명, 다이햐쿠(第百)생명, 타이쇼(大正)생명, 치요다(千代田)생명, 쿄에이(協榮)생명, 도쿄(東京))생명 등 7개 보험사가 차례로 파산하는 잔혹사를 겪었다. 이들은 모두 중소형 생명보험회사였으며, 자산 합계는 1989년 기준 일본 전체 생보사의 15%에 달했다.
1989년 기준 일본 생명보험회사 자산 추이. [이미지=더밸류뉴스]
파산의 핵심 원인은 자산부채종합관리(ALM) 부재였다. 금리가 하락하자 버블기에 판매한 고금리 상품의 부채는 치솟았지만, 자산 운용 수익은 평가손실로 줄어들며 듀레이션 갭이 커져갔다. 국채 수익률 6% 이상 당시 출시한 고금리 고정 이율 보장상품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장기금리가 1%대로 하락하며, 이차역마진 확대와 손실 누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1975년 당시 일본 감독당국은 7~8%대의 자산운용수익률을 고려할 때 4%대에 달하던 예정이율을 인상해야 한다고 보험업계에 요구했다. 일본 계리사협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기금리 하락 추세에서 높은 고정 예정이율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산 거품기에 정부는 은행 대출 연계 보험상품 판매를 허가했고, 보험사들은 앞다퉈 자산 확대 경쟁에 뛰어들었다. 1990년대에 들어 자산 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하며 시장·금리·신용위험은 터지기 시작했다.
연쇄 파산 이후 일본은 보험회계와 감독체계를 전면 개편했다. 예정이율을 현실화하고, 보험부채에 대한 시가평가 체계를 도입했으며, ALM 기반 자산운용 전략을 정착시켰다. 전사적 리스크관리(ERM), 자기위험·지급능력평가(ORSA) 등의 프레임워크도 마련되며 당국은 시뮬레이션 기반 스트레스 테스트를 강화했다.
2026년의 한국은 인구 구조와 저성장 기조에서 당시 일본을 놀라울 정도로 빼닮아 있다. 일본의 사례는 우리에게 단순한 기록이 아닌 정해진 미래의 경고장이다. 일본 보험사들이 파산 전 겪었던 자산 가치 하락과 대량 해약 사태의 전조 현상들이 이미 국내 일부 중소형사를 중심으로 관측되고 있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 몽둥이 든 금융위…"제2의 MG손보 막겠다"
최근 MG손해보험(현 예별손보) 부실 정리 과정에서 나타난 금융당국의 행보는 "보호는 하되 책임은 끝까지 묻겠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재명 대통령도 "수천억원의 부실을 예보에 떠넘기고 집에 가면 끝이냐"며 책임을 추궁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 역시 지난 12일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유관기관 업무보고'에서 "보호는 됐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부실 책임을 철저히 하라"며 예금보험공사를 압박했다. 이에 김성식 예금보험공사 사장은 전·현직 임직원을 대상으로 민·형사상 소송을 포함한 전방위적 조사를 진행하며 유례없는 '인적 청산'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이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유관기관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금융위원회]
하지만 이러한 '응징적 처벌' 중심의 기조는 자칫 산업 전체의 구조적 결함을 가리는 가림막이 될 수 있다. 당국이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다스리는 사이, 정작 시장에서는 심각한 동맥경화 현상이 관측된다. 매각 절차를 밟고 있는 예별손보의 예비입찰을 앞두고, 잠재적 인수자들은 인수 후 들이닥칠지 모를 사후 책임 리스크와 당국의 엄격한 잣대에 부담을 느끼며 몸을 사리고 있다. 처벌에만 매몰된 행정이 오히려 부실 금융기관의 신속한 정상화와 인수합병(M&A)을 가로막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현행 제도가 가입자 보호라는 명분 아래 ‘손실 분담 없는 계약 이전’에만 치중해 있다는 점이다. 가입자가 보험사의 건전성을 따지지 않고, 경영진은 망해도 공적 자금이 뒷수습을 해줄 것이라 믿는 구조적 도덕적 해이는 처벌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부실의 원인을 경영진으로만 한정 짓는 것은 일본이 연쇄 파산 국면에서 도입했던 '가입자-경영진-주주' 간의 합리적 손실 분담 논의를 원천 봉쇄하는 격이다.
◆ '갱생특례법'이 주는 교훈…행정 주도 넘어 ‘사법적 회생 시스템’으로
우리나라의 부실보험회사 정리 제도는 금융산업구조에 관한 법률(금산법)과 예금자보호법을 중심으로 한 행정당국 주도형에 머물러 있다. 금융당국이 부실 지정부터 처리 방법까지 독점적으로 결정하는 구조다. 이는 정치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이해관계자 간의 공정한 재산권 분배가 어렵고 절차적 보장이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반면 일본은 부실 정리를 단순히 행정청의 권한에만 가두지 않았다. 보험업법에 따른 행정 절차 외에도 ‘갱생특례법’을 통해 법원이 주도하는 사법적 회생 절차를 운영하고 있다. 사법부 주도형 정리는 이해조정이 용이하고 규제 왜곡이 적어, 부실 보험사의 자산과 부채를 법적 근거에 기반해 투명하게 조정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일본의 ‘사법적 회생 시스템’이 가진 가장 큰 파괴력은 압도적인 신속성이다. 보험회사의 파탄 처리는 자산 가치 보존이 핵심인데, 일본은 갱생특례법을 통해 재생 신청에서 법원의 개시 결정까지 걸리는 시간을 단 3~4일로 단축시켰다. 이는 다수의 이해관계자 동의를 구하느라 절차가 장기화되고 그 과정에서 자산 가치가 하락하는 비효율을 차단한 것이다.
또 일본은 생명보험 및 손해보험 계약자 보호기구를 독자적으로 설립해 전문적인 자금 지원과 계약 관리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특히 이 보호기구가 방대한 수의 계약자를 대리해 송달, 신고, 의결 등 일체의 행위를 수행하도록 법적 권한을 부여하며 정리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이는 은행, 저축은행, 증권 등 타 업권과 하나로 묶여 있는 우리나라의 통합 예금보험 체계와는 대조적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보험 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보험사가 낸 예금보험료를 타 금융권 부실을 막는 데 공동으로 전용하고 있다. 이는 보험계약자 보호라는 진정한 목적 범위를 넘어서는 부당한 부담이다. 이제 감독당국의 행정 명령이라는 경직된 틀에서 벗어나, 법적 안정성이 담보된 사법 회생 체계로의 패러다임 전환과 독자적 보호기구 설립을 위한 입법적 결단을 서둘러야 할 시점이다.
대한민국 보험 산업의 평온함은 규제라는 댐이 잠시 막아선 착시일 뿐이다. 당국이 정치와 처벌에 매몰되어 '누구 탓인가'를 따지는 사이, 정작 거시경제적 위기를 해결할 체질 개선의 기회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일본이 연쇄 파산을 극복하고 재기한 비결은 처단이 아닌 시스템에 있었다. 가입자, 회사, 당국이 고통을 분담하는 ‘사법 회생’이라는 투명한 법적 경로를 구축했기에 질서 있는 재편이 가능했다.
이제 소모적인 논쟁을 멈추고 ‘어떻게 질서 있게 재편할 것인가’에 대한 입법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선제적인 시스템 혁신만이 한국 보험 산업을 잔혹한 ‘평행이론’의 굴레에서 구출할 유일한 탈출구다.
김도하 더밸류뉴스 금융증권부 기자. [사진=더밸류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