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프라 확산과 함께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둘러싼 경쟁이 다시 산업의 전면으로 떠올랐다. 특히 6세대 HBM4를 둘러싼 기술·생산 경쟁은 단순한 제품 교체를 넘어, 향후 AI 반도체 생태계에서 누가 핵심 공급자로 남을 것인지를 가늠하는 시험대에 가깝다. HBM이 메모리 산업의 ‘한 제품군’이 아니라, AI 성능과 공급망의 안정성을 동시에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HBM4 패권을 향한 K-반도체의 70조 투자 전쟁. [자료=더밸류뉴스]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4 양산 준비 시점을 올해 초로 설정하고 개발과 고객 대응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는 전면적인 대량 양산이라기보다, 초기 양산과 고객 인증을 포함한 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AI 가속기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양사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플랫폼 ‘루빈(Rubin)’ 대응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경쟁사인 마이크론이 올해 중반 이후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내년 상반기 HBM4 공급은 한국 기업 중심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다만 이는 일정, 수율, 고객 검증 속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HBM4 경쟁의 초점은 ‘누가 먼저 내놓느냐’보다 ‘누가 안정적으로 공급하느냐’에 가깝다.
지난해 실적 회복을 발판으로 한 대규모 투자 계획도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설비투자를 30조원대 중반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8일 발표한 실적에서 지난해 4분기 분기 기준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뚜렷한 반등을 확인했다. 상반기에는 모바일 사업이 실적을 견인했고, 하반기에는 메모리 업황 회복과 함께 반도체 부문이 이익 개선의 중심축으로 작용했다. 이는 HBM을 중심으로 한 메모리 구조 재편이 실제 실적에 반영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읽힌다. 삼성전자 역시 DS 부문 투자를 늘려 HBM 생산능력을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양사 합산 투자 규모는 70조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이 같은 투자가 곧바로 실적의 직선적 확대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시장에서는 올해 양사 합산 영업이익이 200조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상단 전망과 함께 보다 보수적인 범위의 추정치도 병존한다.
◆ HBM4 진검승부…TSMC 협업 vs 턴키 전략
HBM4부터는 제조 구조 자체가 한층 복잡해진다. 연산과 제어를 담당하는 베이스 다이(로직 다이)를 메모리 업체가 아닌 파운드리 공정에서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HBM4 경쟁의 핵심 변수는 단순한 메모리 적층 기술을 넘어, 로직 다이 설계와 생산 안정성으로 이동하고 있다. 메모리 업체의 경쟁 무대가 파운드리와 패키징 영역까지 확장되는 셈이다.
삼성전자 vs SK 하이닉스 설비투자 비교. [자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공시자료 외]
SK하이닉스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TSMC와 협업하는 전략을 택했다. TSMC의 12나노 로직 공정을 활용해 베이스 다이를 생산하고, 이를 자사 메모리와 결합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대역폭은 이전 세대 대비 약 2배, 전력 효율은 40% 이상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안정성과 검증된 공정을 우선시한 선택으로 해석된다.
삼성전자는 D램 생산부터 로직 다이, 첨단 패키징까지 아우르는 ‘턴키(일괄) 전략’을 내세웠다. 삼성전자는 HBM4 로직 다이 수율을 약 90% 수준까지 끌어올려 양산 준비를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에서는 단품 D램 기준 수율 60%대만 확보해도 양산이 가능하다고 보는 만큼, 로직 다이 수율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경우 일정 지연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는 HBM4 코어 다이에 10나노급 6세대(1c) D램, 베이스 다이에 4나노 공정을 적용할 계획이다. ‘속도’보다는 ‘통합 역량’을 앞세운 전략이다.
UBS는 올해 엔비디아 ‘루빈’ 플랫폼에 탑재될 HBM4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약 70% 점유율을 차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삼성전자의 양산이 본격화될 경우 점유율이 30% 안팎까지 확대될 가능성도 함께 제시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HBM4부터는 고객별 맞춤형 설계가 더욱 중요해진다”고 언급한 것처럼, HBM4 시장은 단일한 승자를 가리는 구조라기보다, 고객 요구에 따라 세분화되는 경쟁 구도로 이동하고 있다.
◆ 메모리 슈퍼사이클 재진입…HBM이 견인하는 성장 국면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WSTS)는 올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 규모가 약 9750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가운데 메모리 부문은 전체 평균을 웃도는 30%대 성장률이 예상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올해를 과거 1990년대 호황기에 비견되는 메모리 슈퍼사이클 국면으로 평가하며, 그 중심에 HBM이 있다고 분석했다.
D램 시장 내 HBM 비중 변화. [자료= 트렌드포스, 야후파이낸스]
HBM 시장은 올해 약 480억~5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D램 시장에서 HBM이 차지하는 비중도 2024년 약 20%에서 30% 이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모건스탠리는 HBM 시장이 2023년 약 40억 달러에서 2027년 330억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HBM이 중장기적으로 메모리 산업의 중심으로 이동한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다만 연도별 성장 속도에는 변동성이 존재한다.
AI 데이터센터 투자는 이러한 수요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변수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AI 관련 데이터센터 및 인프라 투자가 전년대비 두 자릿수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일부에서 언급되는 8200억달러 수치는 투자 범위 정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단일 숫자보다, AI 인프라 투자가 구조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흐름이다.
◆ 위기 속 기회…K-반도체 동반 성장의 조건
리스크 요인도 분명하다. 골드만삭스는 HBM 공급이 확대될 경우 올해 가격이 한 자릿수 후반대 하락 압력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지만, 공급 역시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가격 결정력은 이전보다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미·중 반도체 갈등 역시 변수다. 미국 정부는 중국 기업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화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 장비 반입도 제한적 관리 체제로 전환됐다. 중국 YMTC와 CXMT 등은 중장기적으로 HBM 시장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 변화 추이. [자료= 카운터포인트리서치]다만 이 같은 위험 요인이 곧바로 경쟁 구도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HBM 경쟁의 핵심은 단순한 생산 능력이 아니라, 공정 안정성·수율 관리·고객 인증 속도처럼 단기간에 따라잡기 어려운 요소에 있다. 첨단 공정 장비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 상황에서, 중국 업체들이 HBM 양산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실제 격차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출하량 기준 한국 기업들의 HBM 시장 점유율은 약 79%에 달한다. 이는 현재 글로벌 HBM 공급의 상당 부분이 한국 기업에 의해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술, 공정, 장비 접근성 측면에서 형성된 이 격차가 단기간에 해소되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런 맥락에서 올해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가 HBM3E 세대의 정점이었다면, 올해는 HBM4 경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첫 해다. 경쟁의 초점도 단순한 점유율 싸움에서, 누가 AI 시대 컴퓨팅 구조의 표준을 제시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지로 이동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쟁은 이제 ‘얼마나 많이 파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구조를 표준으로 만들 것인가’의 문제에 가깝다. HBM4는 그 출발선이다. 결국 두 기업의 전략적 선택이 K-반도체의 다음 장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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