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로벌 자본 시장에서 보험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는 지난달 23일 재보험 자회사인 내셔널 인뎀니티를 통해 일본 최대 손보사인 도쿄마린홀딩스 지분 2.49%를 확보하며 보험사를 ‘자본 엔진’으로 재정의했다. 버크셔는 향후 이 지분을 최대 9.9%까지 늘릴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며 전략적 제휴를 단행했다.
국내에서는 미래에셋생명보험(대표이사 김재식 황문규)이 발행주식의 32%에 달하는 자사주 소각과 AI 반도체 기업 리벨리온 투자를 발표했다.
단순히 상품을 파는 보험사를 넘어, 보험업의 본질인 ‘자금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투자 지주사로 변모하겠다는 선언이다. 버핏과 미래에셋생명이 왜 지금 이러한 행보를 보이는지, 그 이면에 숨겨진 자본의 논리를 분석한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대표. [사진=위키미디어] ◆ 1조원 소각과 플로트의 마법, ‘버핏식 경영’ 이식
워런 버핏이 50년 넘게 보험업을 사랑한 이유는 ‘플로트(Float)’에 있다. 플로트란 보험 계약자가 낸 보험료를 사고가 발생해 보험금을 지급하기 전까지 보험사가 장기간 보유하게 되는 현금을 의미한다.
버핏에게 보험사는 이자를 내지 않고도 수십년간 활용할 수 있는 거대한 자금줄이다. 그는 이 자본을 바탕으로 코카콜라와 애플 같은 우량주를 매집해 ‘버크셔 해서웨이’라는 제국을 건설했다. 버크셔는 지난 2023년 말 기준 약 1688억9500만 달러의 플로트를 보유하고 있다.
미래에셋생명이 최근 단행한 1조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은 이러한 버핏식 경영 철학 중 ‘주주 가치 극대화’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자사주 소각은 전체 주식 수를 줄여 기존 주주들의 지분 가치를 강제로 높이는 행위다.
시장은 이를 미래에셋생명이 단순한 외형 성장이 아닌, 자본 효율성(ROE)을 중시하는 투자 회사로의 체질 개선을 본격화한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지난해 미래에셋생명은 일회성 요인을 제외한 세전 이익이 1987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며, 과감한 자본 재배치를 뒷받침할 기초 체력을 증명했다.
김재식 미래에셋생명 부회장은 지난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향후 미래에셋생명만의 ‘한국형 버크셔 해서웨이’ 모델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며 “이를 위해 보험과 투자가 시너지를 내는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여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재식 미래에셋생명 대표이사 부회장. [사진=미래에셋생명]
◆ 13조 변액보험 엔진, 보험사 경계 넘어 리벨리온 및 해외자산으로
미래에셋생명의 행보가 다른 보험사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그들이 가진 자본의 성격에 있다. 이들은 원금 보장과 고정 금리에 매몰된 일반적인 연금보험 대신, 운용 성과를 고객과 공유하는 변액보험 중심의 사업 구조를 구축해왔다.
지난해 미래에셋생명의 변액보험 수입보험료는 2조4970억원(전년대비 +32.8%)을 기록했으며, 전체 변액보험 적립금은 13조3000억원에 달한다. 특히 ‘MVP60 펀드’의 경우 설정 이후 누적 수익률 115%를 기록하는 등 운용 역량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유연한 자본 엔진은 보험이익(770억원)을 압도하는 투자이익(1175억원)으로 이어졌다. 최근 AI 반도체 기업 리벨리온에 대한 지분 투자는 버핏이 애플을 선택해 포트폴리오를 혁신했듯, 초장기 자본을 ‘미래 인프라’에 배치하는 전략이다.
또 약 1000억원을 출자한 호주 시드니 포시즌스 호텔 개발사업에서 최대 2조원 규모의 차익이 예상되는 등 자기자본투자(PI) 부문에서도 괄목할 성과를 내고 있다. 미래에셋생명이 단순한 보험금 지급 주체를 넘어, 고수익 자산을 발굴하고 투자하는 ‘성장 자본의 공급처’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미래에셋생명 변액보험 펀드유형 구성. [이미지=더밸류뉴스]
◆ '도쿄마린'의 파트너십과 글로벌 투자 허브로의 진화
최근 버핏이 일본 도쿄마린홀딩스에 투자한 배경에는 도쿄마린이 보유한 글로벌 인수합병(M&A) 역량이 자리 잡고 있다. 버핏은 도쿄마린을 전 세계의 우량한 투자 기회를 함께 발굴하고 실행할 수 있는 ‘전략적 파트너’로 낙점한 것이다. 도쿄마린은 지난 2008년 필라델피아 컨솔리데이티드(47억 달러), 2015년 HCC(75억 달러) 등 대형 인수합병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트랙 레코드를 보유하고 있다.
미래에셋생명 역시 그룹의 증권, 자산운용과 연계된 방대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전략적 허브’ 기능을 강화할 수 있는 구조적 강점을 지닌다. 박현주 회장이 호주 호텔 사례를 스페이스X 투자 성공과 견주며 기대감을 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한국형 버크셔 해서웨이’ 모델이 완전히 정착하기 위해서는 보험사의 자산운용 규제 완화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 현재의 엄격한 비율 규제를 위험 기반 자본 중심의 모니터링 체계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창희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보험업에서 중요한 것은 보험료를 먼저 받고 보험금은 미래에 지급하는 구조를 통해 장기적으로 운용 가능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라며 “워런 버핏의 이번 투자는 보험업을 장기 자본 복리를 창출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강력한 신호다”고 분석했다.
결국 미래에셋생명은 보험업이라는 견고한 현금 흐름 안에서 투자 엔진을 구현하며 저평가된 국내 보험업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보험사가 아닌 ‘글로벌 투자 명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이들의 행보가 한국 금융 시장의 리레이팅(Re-rating)을 이끄는 변곡점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