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업계는 '이직(移職) 천국'으로 불린다. 성과가 부진하면 CEO든 임직원이든 순식간에 자리를 잃고, 반대로 성과만 내면 화려하게 스카우트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이런 살벌한 생존 경쟁 속에서도 마치 '갈라파고스 섬'처럼 외부 흐름과 다른 길을 걷는 증권사가 있다.
바로 유진투자증권(대표이사 부회장 유창수)이다.
이 회사의 CEO인 유창수 부회장은 올해로 무려 18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지창 회장은 2009년부터 2023년 6월까지 14년동안 '유진투자증권 회장' 직함을 달았다. 증권업계에서 이런 장수 기록은 전무후무하다.
그렇다면 이들의 비결은 탁월한 성과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유진투자증권을 둘러싼 의외의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유진그룹의 지배구조와 현황. 단위 %. 2025. 3. [자료=공정거래위원회]
1. 유진투자증권은 '강소(强小) 증권사'?
유진투자증권은 '소'(小)는 맞지만 '강'(强)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유진투자증권의 고민은 1등 분야가 없다는 것이다.
버핏연구소가 집계한 2025년 상반기(1~6월) 리그테이블 순위에 따르면, 유진투자증권은 ECM(Equity Capital Market∙자본캐피탈마켓) 부문 14위, DCM(Debt Capital Market∙채권캐피탈마켓) 부문 18위였다. 쉽게 말해 꼴찌 수준이다.
유진투자증권의 리그테이블 성과가 부진한 이유는 올해 상반기 이 증권사의 IPO(기업공개), 유상증자, ABS(자산유동화증권) 주관 실적이 부진했기 때문이다. 유진투자증권은 지난해 말 지능형 로봇 기업 씨메스의 코스닥 IPO 공동주관을 맡은 것을 끝으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유진투자증권이 ECM 역량 강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진투자증권은 지난 2023년 1개팀이던 IPO실을 2팀으로 확대하고 삼성증권 출신의 ECM 전문가 유장훈 상무를 IPO 실장으로 영입했다. 그렇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려면 올해 하반기 이후를 기약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매출액도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유진투자증권의 매출액을 살펴보면 2022년 1조8216억 원(2022), 1조6477억 원(2023), 1조6526억 원(2024)으로 감소세다.
2. 유진투자증권 최고경영진은 '철밥통'이다?
이 질문의 답은 “대체로 그렇다”이다.
유진투자증권은 성과는 부진하지만 최고경영진은 요지부동이다. 유창수 부회장은 2007년 5월 CEO로 취임한 뒤 18년 3개월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 증권업 70여년 역사를 통틀어 '역대 최장수 CEO'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이전 최장수 증권사 CEO는 최희문 전 메리츠증권 대표로 13년 7개월(2010. 2~2023. 11) 재임했다. 최희문 전 대표는 메리츠증권을 중소형 증권사에서 메이저로 점프시킨 성과를 인정받아 장수했다.
유창수 부회장은 올해 3월 주주총회에서 3년 임기로 재선임돼 2028년까지 재임이 확정됐다. 임기를 다 채우면 21년을 증권사 CEO로 재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재임기간이 길다보니 보수 규모가 '억'소리가 난다. 유창수 부회장의 지난해 연봉은 12억 2100만 원으로 전년비 3.5% 증가했고 유진그룹을 통틀어 최고액이다. 그룹 총수인 유경선 회장(약 5억 원 추정)을 훌쩍 뛰어넘는다. 유창수 부회장은 유진투자증권 이사회 의장도 맡고 있어 금융당국이 권고하고 있는 '대표이사·이사회 의장 분리' 원칙에 배치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유창수 부회장은 유진그룹 창업주 유재필 고문 3남으로 유진투자증권을 사실상 독자 경영하고 있다.
유지창 전 유진투자증권 회장도 14년을 회장으로 재임했다. 유지창 회장은 전국은행연합회장을 그만둔 2009년 6월 유진투자증권 회장에 취임해 2023년 6월까지 근무했다. 산업은행 총재를 역임했고 금융감독위원회 증권선물위원장, 재정경제부 국장, 대통령비서실 금융비서관 등으로 근무했다.
3. 임원 승진의 문턱은 ‘바늘구멍’이다?
그렇다.
유진투자증권에서 임원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현재 임원 수는 약 30명에 불과하다. 피어 기업(Peer company∙비교 기업)으로 꼽히는 SK증권이 임원 100여 명을 두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임원 승진 기회가 제한적이다. 특히 홍보팀 출신이 임원으로 승진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홍보팀의 근무 의욕와 동기 부여가 저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 유창수 부회장, 그룹에서 분리해 독자 경영 가능성 있다?
그렇다.
유창수 부회장이 유진투자증권을 비롯한 증권·금융 계열을 떼어내 독립할 것이라는 전망은 오래전부터 업계에서 제기돼 왔다.
유창수 부회장은 2022년 유진투자증권 지분을 일부 매입하는 등 지분을 1.34%까지 늘렸다. 이를 두고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금융 계열사의 계열 분리 가능성을 거론했다. 유창수 부회장은 금융 계열사를 중심으로, 유순태 유진홈센터 사장은 건자재(건자재, 레미콘 등)를 중심으로 각각의 사업 부문을 독립적으로 운영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유진그룹 오너 가계도와 지분 현황. 2025. 7. 단위 %.
최근 유경선 회장 등 오너 일가의 비상장 개인 회사였던 천안기업이 유진기업 자회사로 편입되고 선진엔티에스와 한라흥업이 오는 12월 31일 한국통운에 흡수합병될 예정인 데,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향후 계열 분리와 승계를 염두에 둔 지배구조 조정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유진그룹측은 분리설을 부인하고 있다.
5. 창업주가 생존해있다?
마지막 질문의 답도 “그렇다”이다.
유진그룹을 창업한 유재필 고문은 1932년생(93세)으로 여전히 정정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는 1954년 22세에 영양제과를 세워 건빵 군납 사업으로 사세를 키우며 유진그룹의 초석을 다졌다. 1985년에는 유진종합개발을 설립해 레미콘 사업에 진출해 유진그룹 주력 산업으로 성장시켰다. 2004년 장남 유경선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