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오랫동안 지켜온 ‘시총 1위’ 자리에 SK하이닉스가 바짝 다가서면서 시총의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면이 벌어지는 양상이다. 표면적으로는 두 회사의 시총순위 경쟁처럼 보이지만, 산업계가 주목하는 본질은 따로 있다. AI 반도체 시대에 시장이 어떤 기업에 더 높은 가격을 매기기 시작했느냐는 문제다.
22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 격차는 사실상 초박빙 수준까지 좁혀졌다. 외신들은 이날 SK하이닉스가 장중 기준 삼성전자 보통주 시총을 근소하게 앞서며 한국 상장사 시총 1위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이는 2000년 이후 삼성전자가 지켜온 국내 증시 대장주 위상이 흔들렸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자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이번 순위 변동의 배경은 단순한 반도체 업황 회복이 아니다. 과거 메모리 사이클에서는 D램과 낸드 가격이 오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함께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AI 사이클은 다르다. 시장은 범용 메모리 생산능력보다 AI 서버에 들어가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첨단 패키징 대응력, 핵심 고객사와의 공급 관계에 더 높은 프리미엄을 부여하는 모양새다.
이 구도에서 SK하이닉스는 가장 직접적인 수혜 기업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AI 가속기 시장을 주도하는 글로벌 빅테크와 GPU 업체들이 HBM을 핵심 부품으로 채택하면서, SK하이닉스의 메모리 사업은 더 이상 경기민감형 범용 부품 사업으로만 분류되지 않는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와 맞물려 고부가 메모리 공급사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HBM은 단순히 D램을 여러 층으로 쌓는 제품이 아니다. 고객사 인증, 발열 관리, 수율, 패키징 기술, 장기 공급계약이 맞물린 복합 사업이다. 한 번 공급망에 들어가면 높은 진입장벽을 만들 수 있지만, 반대로 초기 주도권을 놓치면 따라잡는 데 시간이 걸린다. SK하이닉스가 받는 프리미엄은 바로 이 ‘선점 효과’에 대한 시장의 평가다.
다만 SK하이닉스의 질주가 곧바로 구조적 승리로 굳어졌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HBM 시장은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의 추격이 본격화될수록 공급 경쟁이 심해질 수 있다. AI 서버 투자가 장기화하더라도 고객사의 이원화 전략, 가격 협상력 변화, 차세대 제품 전환 속도에 따라 수익성은 달라질 수 있다. 현재의 프리미엄은 강하지만, 동시에 검증받아야 할 프리미엄이기도 하다.
삼성전자도 반격 카드를 가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생산능력과 자본력, 파운드리·시스템반도체와의 결합 가능성, 글로벌 고객 기반에서 여전히 압도적인 체급을 갖고 있다. 차세대 HBM 공급 확대와 고객 인증이 가시화될 경우 시장의 평가는 빠르게 바뀔 수 있다. 삼성전자가 잃은 것은 기업의 체급이 아니라 AI 메모리 시장에서의 ‘속도 프리미엄’이다.
결국 두 회사의 시총 경쟁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평가 기준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규모, 생산능력, 사업 포트폴리오가 대장주를 결정했다면, AI 시대에는 핵심 고객과의 연결성, 고부가 제품 비중, 차세대 메모리 전환 속도가 기업가치를 좌우한다.
산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총 경쟁은 한국 반도체 산업 중심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범용 메모리 중심의 사이클 산업이 AI 인프라 핵심 부품 산업으로 재분류되는 과정에서 시장의 가격표가 새로 붙고 있는 상황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이와관련 삼성전자는 "시가총액 관련해서 부정확한 수치가 인용돼 투자자들의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며 "시가총액은 주가와 발행주식수를 곱해서 산출되는 것으로, 보통주와 우선주를 포함한 주식 가치의 전체 합계"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이날 14시 기준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보통주 시총 2068.9조원 (보통주 주식수 59.2억주 X 보통주 가격 34만9500원)과 우선주 시총183.3조원(우선주 주식수 8.2억주 X 우선주 가격 22만4750원)의 합계 2252.2조원이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