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확산되자 국내 일부 지역에서는 종량제 봉투를 미리 사두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석유화학 원료가 부족해지면 생필품도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 심리가 번진 것이다. 기자가 사는 동네 마트에도 한 때 종량제 봉투는 '1인당 3개씩'만 판매하겠다는 안내가 붙었다. 이처럼 공급망에 대한 공포는 실제 부족보다 빠르게 소비자의 행동을 자극한다. 비닐봉투 한 장을 둘러싼 불안은 석유화학 산업이 무너지면 일상과 제조업 생태계 전체가 멈춰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중국의 대규모 설비 증설에 따른 구조적 공급과잉과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이중 압박에 직면해 있다. 호르무즈 해협 리스크 등으로 나프타 가격과 국제 유가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원가는 오르는데 판매 가격은 중국발 저가 공세에 묶이는 구조다. 이는 단순한 업황 둔화가 아니라 범용 석유화학 중심의 기존 성장 모델이 구조적 한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위기 속에서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은 이미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소재 중심으로 사업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과거 우리와 비슷한 위기를 겪었던 일본은 정부의 파격적인 세제 혜택과 규제 완화라는 지원 아래, 기업 간 중복 설비를 통폐합하고 반도체 소재 등 스페셜티 산업으로 체질 개선에 성공한 바 있다. JSR(일본합성고무)은 타이어용 고무에서 반도체 핵심 소재인 'EUV 포토레지스트' 세계 1위로, 스미토모화학은 범용 플라스틱에서 '디스플레이용 고기능 필름'으로 사업 축을 옮기며 글로벌 공급망의 강자로 거듭났다.
다만 ‘스페셜티 전환’이 만능 해법은 아니다. 지금처럼 거의 모든 기업이 동시에 배터리·친환경 소재 중심으로 몰릴 경우, 향후 해당 시장에서도 또 다른 공급과잉과 경쟁 심화가 재현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범용에서 스페셜티로 이동했지만 모두가 같은 시장에 집중하면 ‘고부가가치의 범용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다. 막대한 설비 투자 이후 기술 차별화 없이 가격 경쟁에 다시 빠질 경우, 현재의 구조적 위기가 형태만 바꿔 반복될 가능성도 있다.
더 큰 문제는 범용 설비 축소 과정에서 기초 소재 자급망이 과도하게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익성이 낮다고 범용 NCC 설비를 급격히 줄일 경우, 비닐·포장재·산업용 플라스틱 등 국가 제조업의 기본 토대까지 특정 해외 공급망에 의존하게 될 수 있다. 이는 공급 효율화가 아니라 공급망 안보 리스크가 될 수 있다. 결국 범용을 무조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경쟁력이 없는 중복 설비는 줄이되 국가 제조업을 지탱할 최소한의 기초 소재 자급선은 유지하는 균형을 맞춰야 한다.
한국 석유화학 산업은 ‘범용의 축소’와 ‘스페셜티 확대’라는 단순한 셈법이 아니라,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지킬 것인지에 대한 산업 전략을 요구받고 있다. 비닐봉투 사재기가 보여준 생활 속 불안처럼, 기초 소재 공급망은 산업단지 밖 국민의 일상과 직결된다. 범용의 경쟁력 한계를 인정하되 공급망 안전판까지 포기하지 않고, 동시에 스페셜티 전환 과정에서 또 다른 과잉 경쟁을 피할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한국 석유화학 산업의 미래는 ‘범용을 버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범용을 남기고, 어떤 스페셜티로 이동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손민정 더밸류뉴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