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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혁신 신약’까지 42.195km, ‘풀코스 마라톤’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 기사등록 2026-05-12 10:5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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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밸류뉴스=권소윤 기자]

단박에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할 수는 없다. 42.195km, 이 긴 거리를 달리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초급 코스, 하프대회부터 시작해, 6개월 이상의 훈련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완주할 역량을 갖추게 된다. 현재 정부가 제약업계를 향해 던진 ‘복제약(제네릭) 대신 혁신 신약을 만들라’는 주문은 이제 막 달리기를 시작한 이에게 당장 풀코스 마라톤을 뛰라는 소리와 같다.


국내 제약사들에게 제네릭은 단순한 ‘카피약’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확보해 연구개발(R&D)에 재투자하고, 생산·임상·허가 역량을 축적하는 ‘훈련 코스’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상당수 중견 제약사들은 제네릭과 개량신약으로 확보한 수익을 기반으로 바이오시밀러와 혁신 신약 개발까지 사업을 넓혀 왔다.


하지만, 보건복지부가 최근 의결한 약가제도 개편안에 따라 올 하반기(8월경)부터 제네릭 의약품의 산정률이 기존 53.55%에서 45%로 하향 조정된다. 업계가 마지노선으로 제시했던 48.2%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단순한 가격 인하를 넘어 국내 제약산업의 체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이러한 결단을 내린 이유는 건강보험 재정에 경고등이 켜졌기 때문이다. 고령화에 따른 의료비 급증과 지출 증가로, 올해 적자 전환이 전망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오는 2030년에는 누적 준비금이 모두 소진될 것이라고 한다. 2030년 총진료비 규모는 최대 191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2024년(약 116조원) 대비 6년 만에 60% 이상 급증한 수치다.


한국의 국민의료비 대비 약제비 비중은 지난해 기준 20.5%로, 일본(16.3%), 독일(14.3%), 영국(11.8%)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 다소 높은 편이다. 게다가, 연 매출 1000억원 이상의 성분 하나에 수십 개가 넘는 제네릭이 난립하고, 영업조직 없이 위탁 생산(CMO)과 영업 대행(CSO)에만 의존하는 ‘무늬만 제약사’가 급증했다는 점도 정부가 칼을 뽑아든 배경이다.


문제는 이러한 조정 과정에서 성실히 R&D 역량을 축적해온 제약사들까지 함께 타격 받는다는 것이다. 국내 제약사들에게 제네릭은 신약 개발이라는 장거리 마라톤을 위한 ‘기초 체력’과도 같다.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평균 10~15년의 시간과 2조원 이상의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지만, 성공 확률은 10%에 불과하다. 반면 제네릭은 비교적 짧은 개발 기간과 생물학적동등성시험(BE) 등을 통해 시장 진입이 가능해 안정적인 현금 창출원이 돼 왔다.


약가제도 비대위 설문조사 결과, 이번 개편안으로 업계의 영업이익은 평균 51.8% 급감하고, R&D 투자 예산 역시 약 25.3% 축소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산업의 허리인 중소 제약사와 업계에 창의성을 불어넣는 스타트업이 무너지면, 대형 제약사와의 ‘오픈 이노베이션’ 생태계도 마비될 수밖에 없다. 기초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미래 먹거리인 비만 치료제, 항체-약물 접합체(ADC), 인공지능(AI) 임상 개발 등의 전환을 꿈꾸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건강보험 재정 안정은 경쟁력 있는 국내 제약산업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하다. 혁신을 위한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외국계 제약사의 고가 신약 의존도만 높아진다면 건보 재정 부담은 오히려 더 커질 수 있다. 정부가 혁신 신약을 원한다면, 제약업계가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도록 돕는 ‘트레이닝 시스템’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


[기자의 눈] ‘혁신 신약’까지 42.195km, ‘풀코스 마라톤’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권소윤 더밸류뉴스 기자. [사진=더밸류뉴스]


vivien9667@thevalu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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