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측은 영풍∙MBK와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한국 재계에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신통방통한' 경영권 방어 수단(tool)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최윤범 회장측은 올해 1월 22일 SMC(Sun Metal Corporation)→영풍의 순환출자를 형성해 경영권을 방어했다. 고려아연 임시 주총(23일)을 불과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 22일 고려아연의 호주 손자회사 SMC가 기습적으로 영풍 지분 10.33%를 장내 매입해 고려아연→SMH(Sun Metal Holdings) →SMC→영풍→고려아연의 순환출자를 형성한 것이다.
순환출자가 형성되면서 영풍이 보유한 고려아연 지분(약25%)의 의결권이 정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상법 제369조 제3항은 '회사가 10%를 초과하는 지분을 가진 상대 회사가 보유한 자기 회사(고려아연) 주식은 의결권이 없다"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원래 순환출자를 악용해 경영권을 확보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인데 이를 고도의 법기술로 역이용한 것이다. 최윤범 회장은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영풍그룹 지배구조와 현황. 2025. 9. 단위 %. [자료=공정거래위원회]
최윤범 회장측이 다시 한번 승부수를 던졌다. 미국 국방부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묘수를 둔 것이다. 그러자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이 ‘신주발행 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고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신문 절차가 진행된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를 두고 재계 관계자와 자본시장 참여자들이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이번 가처분의 핵심은 단순한 투자 타당성 논란을 넘어선다. 미국 대규모 제련소 건설이라는 ‘국가적 명분’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U턴형 자금 구조’가 경영권 방어를 위한 ‘변칙적 수단’인지를 가려내는 고도의 법리 싸움이다.
◆ 이수만 SM엔터 총괄 프로듀서의 가처분 '인용'(증자 금지)
이번 가처분 신청의 향후 결과에 관해서는 "판결이 나와 봐야 안다"로 요약된다. 그만큼 예측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유사 판례를 보면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고려아연 제3자 배정 유상증자 금지 가처분 신청 유사 판례.
이번 고려아연 가처분 신청과 논리적으로 유사하고 영풍 측이 주요 근거로 삼을 수 있는 판례로는 지난 2023년 3월 SM엔터테인먼트 경영진이 카카오를 상대로 신주 및 전환사채(CB)를 발행하기로 하자 당시 최대주주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가 가처분을 신청한 케이스가 있다.
법원(서울동부지법)은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 손을 들어주고 카카오 대상 신주 및 CB발행을 금지했다. 판결 요지는 "SM엔터테인먼트는 충분한 현금 유동성을 보유하고 있어 긴급하게 자금을 조달할 필요성이 낮다"는 것이었다. 법원은 경영권 분쟁이 현실화된 상황에서 지배권 구조에 변동을 일으키는 신주 발행은 회사의 자금 조달 필요성보다 경영진의 지배력 유지가 주된 목적으로 보인다면 위법하다고 봤다.
그간의 판례를 보면 법원은 경영권 분쟁 국면에서 이뤄진 제3자 배정 증자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왔다. 이는 영풍 MBK 연합 측에 유리하다.
영풍측은 고려아연이 충분한 자금력이 있음에도 제3자 증자를 강행하는 것은 최윤범 회장의 우호 지분 확보를 위한 꼼수라는 점을 부각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응해 고려아연측은 단순 자금 조달이 아니라 미국 제련소 투자와 같은 구체적이고 중대한 전략적 제휴임을 입증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고려아연측에 유리한 판결도 있다. 2020년 말 한진칼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위해 산업은행을 대상으로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결정하자 주주연합(KCGI 등)이 가처분 신청을 했다.
그해 12월 법원(서울중앙지법)은 한진칼의 손을 들어주고 유상증자를 허용했다. 판결 요지는 "항공산업 재편이라는 막중한 경영상 목적과 산업은행이라는 공적 기관의 참여가 지배권 방어 목적보다 우위에 있다"로 요약된다. 법원은 "경영권 분쟁 중이라 하더라도 신주 발행이 사업의 다각화, 전략적 제휴, 재무구조 개선 등 객관적인 경영상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이 판례는 고려아연측에 유리하다. 고려아연 측은 이번 증자가 미국 제련소 건설을 위한 국가 전략 프로젝트이자 전략적 제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법원이 이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 U턴형 자금 순환 구조, 고려아연측에 불리
고려아연측이 불리한 요소가 더 있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이례적인 대목은 자금의 흐름이다. 고려아연측 발표에 따르면 미국 JV가 돈을 들고 들어와 한국 본사 주식을 사고, 본사는 다시 그 돈을 미국 지주사로 보내야 한다. 영풍·MBK는 이를 '자금 세탁에 가까운 지분 확보 작전'으로 규정하고 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 구조가 고려아연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무엇보다도 자금의 효율성이다. 1조 원대 자금이 태평양을 두 번 건너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전 비용, 세금, 수수수료 등을 고려할 때 이것이 합리적인 경영 판단(Business Judgment Rule) 범주 내에 있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리스크의 비대칭성도 관건이다. 미국 사업회사가 빌리는 약 7조 원에 가까운 거액의 차입금 전액에 대해 한국 본사가 지급보증을 서면서도, 미국 파트너들은 본사 지분만 챙겨갔다. 이는 본사가 과도한 재무적 위험을 떠안으면서 지배구조만 변경한 것으로 비쳐질 소지가 크다.
여기에 대응해 고려아연 측은 "이 구조가 '미국 정부의 보증'을 끌어내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 설계"라고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 한국 본사가 지급보증을 서고 지분으로 엮여 있어야만 장기적인 제련소 운영의 안정성을 담보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고려아연 연혁과 경영권 분쟁 일지.
◆ 승부를 가를 관건은 '문서화된 증거(Hard Evidence)'
결국 법원의 판단은 '말'이 아닌 '서류'에서 갈릴 가능성이 높다.
재판부는 심리 과정에서 고려아연 측에 "미국 정부나 전략적 파트너사가 한국 본사의 신주 배정을 계약의 '선행 조건'으로 내걸었는가"에 대한 입증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고려아연이 미국 에너지부(DOE)나 파트너사와의 협상 과정에서 "본사 지분 참여 없이는 투자가 불가하다"는 취지의 공식 서한이나 상세 계약서(definitive agreement)를 제출한다면 이는 경영상의 긴박한 필요성을 인정받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만약 "전략적 관계 강화를 위해 우리가 먼저 제안했다"거나 '구두로 협의된 사항' 수준에 그친다면 법원은 이를 경영권 분쟁에 대응하기 위한 '인위적인 지분 구조 변경'으로 해석해 가처분 신청을 인용할 가능성이 높다.
가처분 신청이 기각되면 - 법원이 고려아연측 손을 들어주면 - 최윤범 회장 측은 약 10.3%에 달하는 우군 지분을 확보하며 경영권 방어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다. 이는 영풍·MBK의 경영권 확보를 꺾는 '한 방'이 될 것이며 미국 제련소 사업 역시 탄력을 받게 된다.
반대로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면 - 법원이 영풍·MBK측 손을 들어주면 - 최윤범 회장의 이번 '승부수'는 자충수가 된다. 경영권 방어 전략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물론 미국 정부와의 프로젝트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책임론에 직면하게 된다. 또 기존 주주의 권리를 무시한 무리한 증자 시도였다는 비판과 함께 배임 논란으로 번질 수 있어 최 회장 측에는 치명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안이 국내 자본시장에 던지는 메시지가 크다고 본다.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해외 투자라는 명분이 경영권 분쟁 국면에서 만능키가 될 수 없다"며 "법원은 사업의 타당성보다는 그 사업을 수행하는 방식이 주주 평등의 원칙을 훼손했는지에 집중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결국 법원 판단은 ‘미국 제련소 건설의 전략적 가치’와 ‘기존 주주의 신주인수권 보호’ 사이에서 어디로 기울 것인 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