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약, 치솔, 비누, 샴푸, 물티슈, 마스크...
이들 제품군의 공통점은 '소비자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다'로 요약된다. 다시 말해 가격이 단 한 푼이라도 저렴한 또 다른 제품이 나오면 소비자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경제학 용어로 풀어 쓰면 수요의 가격 탄력성(price elasticity of demand)이 어마어마하게 높다.
그런데 이런 제품군을 팔아 한국 재계에 당당히 진입한 대기업집단이 있다. 치약, 비누 팔아 돈 벌어 이제는 중후장대한 항공사를 운영하고 있고 최근에는 K-뷰티로 글로벌 시장에서도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AK홀딩스(회장 장영신)를 지주사로 둔 애경그룹이 주인공으로 코로나19 쇼크를 딛고 제2도약에 나서면서 향후 어떤 길을 걷게 될지 관심을 끌고 있다.
◆대기업집단 63위, 코로나19 쇼크 극복하며 한 단계↑... 제주항공으로 재계 진입
애경그룹은 올해 초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한기정, 이하 공정위) 발표 공시대상기업집단 62위를 기록했다. 전년비 한 단계 올랐다. 그룹 전체 매출액 4조6830억원, 순이익 2070억원으로 전년비 매출액은 20.94% 증가했고 순이익은 54.56% 감소했다(이하 K-IFRS 연결).
계열사는 애경케미칼(화학), 애경산업(생활용품, 뷰티), 제주항공(이상 상장사), AK플라자(유통. 옛 AK에스앤디), 애경자산관리 등 31개로 전년비 11개 감소했다.
지난해 기준 이들 계열사의 매출액 비중을 살펴보면 애경케미칼(1조7937억원)과 제주항공(1조7240억원)이 주력이고 이어 애경산업(6688억원), AK플라자(433억원) 순이다.
이 가운데 애경그룹을 대기업집단으로 점프시킨 계열사는 국내 1위 LCC(저비용항공사. Low Cost Carrier) 제주항공이다.
애경그룹은 지난 2005년 제주특별자치도와 합작해 제주항공(당시 제주에어)을 설립했다. 고(故) 채몽인(1917~1970) 애경그룹 창업주가 제주도 출신인 것이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는 제주도와 합작하는 방식이었지만 유상증자를 거치며 현재 애경그룹이 최대주주(50.37%)로 책임 경영을 하고 있다. 2대주주는 국민연금(7.84)이다.
애경그룹의 제주항공 사업 진출은 성공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주항공이 AK홀딩스 계열사가 되면서 사이즈가 커졌고 2019년 공정위 대기업집단에 처음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62위). 이후 순위 변동을 살펴보면 60위(2020, 2021)→61위(2022)→63위(2023)에 이어 이번에 62위를 기록했다.
제주항공은 코로나19 쇼크로 2019~2022년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지만 지난해 매출액 1조7240억원, 영업이익 1698억원, 순이익 1343억원으로 흑자전환했다. 국내 LCC 기준 첫 국제선 취항, 2015년 11월 코스피 상장 등으로 국내 LCC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화물전용 운송기 2대를 포함해 항공기 보유대수가 총 42대로 국내 LCC 중 가장 많다. 차세대 B737-8 기종은 기존 B737과 동일한 형태와 부품, 장비 등을 가지고 있어 기존의 인력이나 인프라를 그대로 활용하면서도 기존 B737 대비 개선된 연료 효율과 약 1000㎞ 더 많은 항속거리가 강점이다.
최근에는 항공화물운송에도 나서며 국내 LCC중 유일하게 화물전용 운송기를 보유하고 있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항공운송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는데, 이러한 기회를 선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화물 운송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규모는 작지만 제주항공의 지난해 3분기 화물 운송량은 4690톤으로 전년비 60% 증가했다. 최근에는 아시아나항공 화물사업부 인수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현재는 한발 물러선 상태다.
◆애경케미칼, 글로벌 PA(무스프탈산) 시장 점유율 1위
제주항공과 함께 애경그룹 미래를 이끌어갈 계열사로는 애경케미칼이 꼽힌다. 애경케미칼은 애경유지공업을 모태로 하고 있고, 고부가가치 석유화학제품, 친환경소재, 에너지 등 미래 먹거리로 주목 받고 있다.
애경케미칼은 지난 2021년 애경유화, 애경화학, AK켐텍 3사가 합병해 출범했다. 애경유화는 1970년 설립된 삼경화성이 모태다. 삼경화성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PA(무스프탈산·Phthalic Anhydride)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애경유화는 글로벌 PA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석유화학 사업은 고(故) 채몽인 창업주가 애정을 갖고 진행했다. 삼경화성은 1972년 연 8400톤 규모의 무스프탈산 생산을 기반으로 수직계열화를 진행했고 1994년 사명을 애경유화로 변경했다.
최근에는 이차전지 소재, 친환경 건축자재 및 가소제 사업에 나서고 있다. 베트남 가소세 생산∙판매 법인인 VPCHEM 지분 50%를 인수했고 북미, 유럽 시장에도 진출하고 있다.
◆주력 사업 백화점, 석유화학, 생활용품에서 1위 못해...AK플라자는 만성적자
고민과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애경그룹의 주요 제품군이 해당 시장에서 1등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애경산업은 주방세제 트리오로 잘 알려진 생활용품 계열사인데 이 분야 1위는 LG생활건강이다. 애경산업은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애경케미칼도 금호석유화학이라는 1등 경쟁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애경케미칼은 이 시장에서 2위이다. AK플라자도 백화점 업계 2군이다. 1군은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애경그룹은 신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애경산업은 화장품 사업에 진출해 ‘AGE 20’S’, ‘루나’ 등 화장품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아직은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 등 상위권 업체들에 비해 아쉬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실적 개선이 유의미하다. 지난해 애경산업 실적을 살펴보면 매출액 6461억원, 영업익 625억원으로 전년비 9.56%, 66.6% 증가했다. 매출액 비중은 생활용품과 화장품이 각각 6대 4를 유지하고 있다.
AK플라자는 애경그룹 계열사 중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에 이어 백화점 '빅4'에 진입하기도 했지만 명품 시장에 밀리며 고전하고 있다. 최근 온라인 사업부인 AK몰을 큐텐에 매각했고, 명품 브랜드 대신 식음료 위주의 NSC(Neighborhood Shopping Center) 전략을 펴고 있다. NSC란 쉽게 말해 인구 2만명 단위를 고객권으로 하는 소형 슈퍼센터를 말한다. AK플라자는 지난해 매출액 2475억원, 영업손실 261억원, 당기순손실 439억원으로 매출액은 소폭(0.1%) 증가했지만 영업손실과 당기순손실은 각각 41.05%, 39.80% 확대됐다.
◆장남 채형석 총괄부회장 경영 전반 맡아
애경그룹을 이끌고 있는 장영신 회장은 남편 고(故) 채몽인 창업주가 1970년 갑작스럽게 타계하자 막내(채승석 전 애경개발 사장) 출산 3일만에 경영을 맡았다. 주방세제 트리오를 히트시키며 애경그룹 기반을 닦았다.
장남 채형석 AK홀딩스 총괄부회장이 경영 전반을 맡고 있다. 채형석 총괄부회장은 수십억원대 회사자금 형령으로 구속됐고 2009년 4월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차남 채동석 AK홀딩스 부회장은 애경산업의 가습기 관련 소비자 분쟁을 겪으며 곤혹을 치렀다. 막내 채승석 전 애경개발 대표는 2020년 9월 프로포폴을 불법 투약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됐다. 채 전 사장은 검찰 수사 도중 사표를 넀다.
애경그룹 지배구조는 복잡한 편이다. 장영신 일가→애경자산관리(100%)→AK홀딩스(18.9%) 애경케미칼(62.2%)·애경산업(45.1%)·제주항공(50.4%)·AK플라자(59.8%)로 이어진다. 애경자산관리 최대주주는 채형석 총괄부사장(49.17%)이다. 이어 채동석 부회장(21.69%), 채승석 전 애경개발 사장(11.66%), 채은정 전 애경산업 부사장(11.02%), 장영신 회장(5.39%) 순이다. 채형석 총괄부회장 장남 채정균도 지분(1.07%)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