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지난해 역대 최고 수준의 운용성과를 거뒀지만 연기금의 자산배분 전략을 새 시장 환경에 맞춰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다.
지난 6일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에 위치한 금투협회 3층 불스홀에서 자본시장연구원과 한국금융공학회가 연기금의 바람직한 자산배분 전략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사진=더밸류뉴스]
과거 저금리 환경에서 대체투자가 수익률 제고와 분산투자에 힘을 보탰다면, 최근에는 코스피 리레이팅과 해외부동산·사모신용 리스크가 동시에 부상하고 있다. 연기금 운용의 과제가 ‘얼마나 더 벌 것인가’에서 ‘어떤 체계로 안정적으로 벌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자본시장연구원(원장 김세완)과 한국금융공학회(회장 안세륭)가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센터 불스홀에서 ‘연기금의 바람직한 자산배분 전략’ 심포지엄을 공동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저성장, 고변동성, 고환율 등 뉴노멀이 지속되는 환경에서 연기금의 리스크를 줄이고 중장기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행사에는 존 캠벨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기조발표자로 나섰다. 이어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국내 연기금의 자산배분 전략을 주제로 발표했다. 패널토론에는 한국투자공사,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삼성자산운용, 학계 관계자들이 참여해 연기금 운용 방향을 논의했다.
◆ 캠벨 “지금이 새 국면인지 판단하는 게 투자관리 최대 난제”
캠벨 교수는 투자관리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으로 “지금의 시장 환경이 과거와 같은가, 아니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는가”를 꼽았다. 시장이 바뀌지 않았는데 섣불리 ‘이번에는 다르다’고 판단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실제 구조 변화가 나타났는데 이를 무시하는 것 역시 투자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 6일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 금투협회 3층에 위치한 불스홀에서 캠벨 교수가 발표 중이다. [사진=더밸류뉴스]
그는 단순한 통계 수치만으로 시장의 구조 변화를 판단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봤다. 통계적 접근은 기술적으로 복잡하고, 투자자가 이해하기 어려우며, 중요한 변화를 뒤늦게 포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투자자는 통계적 증거와 경제 이론, 보조적 데이터를 함께 활용해 시장 변화를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핵심 사례로는 주식과 채권의 관계 변화가 제시됐다. 전통적으로 연기금 포트폴리오에서 주식과 채권은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했다. 주식이 위험자산으로 수익률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면, 채권은 시장 충격 시 포트폴리오를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
미국, 영국, 유로채 베타 변화. [이미지=자본시장연구원]
그러나 캠벨 교수는 이 관계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지난 1980~1990년대 채권 베타는 약 0.4로 양의 값을 보였지만, 2010년대에는 약 -0.2로 전환됐다. 최근에는 채권 베타가 다시 양의 영역으로 돌아섰다. 이는 주식과 채권이 다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주식과 채권이 함께 움직이면 연기금 운용은 더 어려워진다. 주식이 하락할 때 채권이 방어해주는 전통적 분산투자 공식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캠벨 교수는 이러한 변화가 일시적 현상인지, 20세기 패턴으로 돌아가는 구조 변화인지 판단하는 것이 투자관리의 핵심 과제라고 봤다.
연기금은 일반 투자자보다 투자 기간이 길다. 단기 변동성보다 장기 위험 프리미엄을 취하는 전략이 중요하다. 다만 자산 간 상관관계가 달라지면 장기 투자자에게도 기존 포트폴리오의 위험 구조를 다시 점검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존 캠벨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자산가격과 장기 자산배분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로 꼽힌다. 특히 루이스 비세이라와 함께 쓴 <전략적 자산배분>은 기관투자자의 장기 포트폴리오 운용을 다룬 대표 연구로 평가받는다.
◆ 이효섭 “3고·저출생·환율·코스피 리레이팅…자산배분 체계 고도화 필요”
이효섭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연기금이 과거와 다른 운용 환경에 놓였다고 진단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어졌던 저금리·저물가의 대안정 시대가 끝나고,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의 3고 환경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일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 금투협회 3층에 위치한 불스홀에서 이효섭 선임연구위원이 발표 중이다. [사진=더밸류뉴스]
이 연구위원은 글로벌 성장률 둔화가 위험자산의 기대수익률을 낮추고 있다고 봤다. 고물가와 재정 수요 확대는 채권의 안정자산 역할을 약화시킬 수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는 예상치 못한 손실 가능성인 꼬리위험을 키우고, 주식과 채권의 양의 상관관계는 포트폴리오 분산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
주요국 상업용 부동산 가격 추이 및 미국 주요 도시 오피스 공실률 추이. [이미지=자본시장연구원]
디지털 전환도 변수로 제시됐다. 코로나19 이후 원격근무가 확산되고 AI 기술 투자가 커지면서 해외 상업용 부동산의 매력은 약해지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지난 2021년 이후 미국, 유럽, 싱가포르 등 주요 선진국 상업용 부동산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섰고, 미국 주요 도시 오피스 공실률이 10년 전보다 2~3배 오른 20~30%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연기금의 고유한 과제도 있다. 저출생과 고령화로 연금 수입은 줄고 지출은 늘어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수입과 지출 구조를 단기간에 바꾸기 어렵다면 운용수익률 제고가 연금 고갈 시점을 늦추는 핵심 수단이 된다.
국내 거주자 해외증권투자 규모 및 원달러 환율 추이. [이미지=자본시장연구원]해외투자 확대에 따른 환율 영향도 커졌다. 국내 거주자의 해외증권투자 규모가 2010년 1100억달러에서 2025년 1조2000억달러로 15년간 약 10배 늘었다고 제시했다. 연기금은 장기 수익률과 분산투자를 위해 해외자산 투자를 늘릴 필요가 있지만, 대형 기금의 해외투자는 외환시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연구위원은 대응 과제로 5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ALM(자산부채종합관리)을 고려한 TPA(통합포트폴리오) 체계 도입이다. ALM은 자산과 부채를 함께 관리하는 방식이다. 연기금은 단순히 자산 수익률만 볼 것이 아니라 미래 연금 지급 의무까지 고려해 자산배분을 정해야 한다.
(자산부채종합관리; Asset Liability Management: 보유 자산의 수익률뿐 아니라 미래에 지급해야 할 연금 부채까지 함께 고려해 운용 전략을 세우는 방식이다.)
(통합포트폴리오; TPA·Total Portfolio Approach: 자산군별 칸막이보다 전체 포트폴리오의 위험과 수익을 중심으로 투자 대상을 조정하는 운용 체계다.)
둘째는 기금별 특성에 맞는 환헤지 정책이다. 해외투자가 커질수록 환율 변동은 수익률과 시장 안정에 동시에 영향을 준다. 셋째는 코스피 리레이팅을 반영한 국내주식 목표비중 검토다. 국내 증시가 기업 실적 개선과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을 바탕으로 재평가되고 있다면, 과거 기준의 목표비중만으로 기계적 리밸런싱에 나서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다.
넷째는 투자전략 다변화와 자산배분 인프라 개선이다. 다섯째는 대체자산 중심 위험관리 체계 강화다. 해외부동산, 사모신용, 인프라 투자 쏠림이 커진 만큼 공정가치 평가와 위탁운용사 관리, 전략별 위험점검 체계를 함께 고도화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다섯째는 대체자산 중심 위험관리 체계 강화다. 해외부동산, 사모신용, 인프라 투자 쏠림이 커진 만큼 공정가치 평가와 위탁운용사 관리, 전략별 위험점검 체계를 함께 고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 대체투자서 코스피까지…성과 낸 자산배분, 다음 공식은
연기금 운용에서 자산배분은 단기 종목 선택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SAA(전략적 자산배분)는 주식, 채권, 대체투자 등 자산군별 장기 비중을 정하는 운용의 기본 틀이다. TAA(전술적 자산배분)가 단기 시장 상황에 따라 비중을 일시적으로 조정하는 전략이라면, SAA는 연기금의 장기 수익률과 위험 수준을 좌우하는 뼈대에 가깝다.
(전략적 자산배분; Strategic Asset Allocation: 연기금의 장기 목표수익률과 위험 수준에 맞춰 주식, 채권, 대체투자 등 자산군별 기준 비중을 정하는 방식이다.)
(전술적 자산배분; Tactical Asset Allocation: 단기 시장 전망에 따라 특정 자산군 비중을 일시적으로 늘리거나 줄이는 방식이다.)
글로벌 주요 연기금 누적수익률 추이 및 수익률 기여도 그래프. [이미지=자본시장연구원]
국민연금의 성과도 이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 연구위원은 국민연금 수익률의 90~95%가 전략적 자산배분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2000년 이후 국민연금 누적수익률은 462%로 캐나다 CPPI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준으로 제시됐다.
대체투자는 그동안 국민연금의 수익률 제고와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뒷받침한 핵심 자산군이었다. 국민연금은 저금리 환경에서 전통 자산만으로 장기 수익률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부동산, 인프라, 사모투자 등 대체투자 규모를 확대해왔다. 국민연금 대체투자 규모와 비중은 2010년 19조원·5.8%에서 2025년 233조원·16.0%로 커졌다.
성과도 확인됐다. 국민연금 대체투자 수익률은 2021년 23.80%를 기록하며 전체 성과에 힘을 보탰다. 2022년에는 국내주식, 해외주식, 국내채권, 해외채권이 모두 마이너스 수익률을 보인 상황에서도 대체투자가 8.94%의 수익률을 냈다. 전통자산이 동반 부진했던 국면에서 대체투자가 포트폴리오 방어 역할을 한 셈이다.
연기금 운용수익률 및 자산별 수익률 추이. [이미지=더밸류뉴스]
지난 2024년에도 대체투자는 17.09%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국민연금은 당시 대체투자 수익률에 자산의 평가가치 상승과 실현이익이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저금리 이후 대체투자 확대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장기 포트폴리오의 수익원을 넓히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같은 방식의 확대가 정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체투자가 커진 만큼 리스크도 커졌다. 해외 상업용 부동산 가격 조정과 오피스 공실률 상승은 부동산 투자 수익성을 압박한다. AI 투자 확대는 데이터센터와 인프라 투자 기회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공급 과잉과 사모신용 부실 우려를 낳고 있다.
고물가도 양면적이다. 물가 상승은 인프라 배당수익과 부동산 임대수익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면 경기침체를 동반한 고물가는 대체투자 자산의 본질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다. 과거에는 대체투자를 늘리는 것 자체가 수익률 제고의 해법으로 작동했다면, 이제는 어떤 대체자산을 어떤 가격에 담고 어떻게 평가·관리하느냐가 더 중요해진 셈이다.
동시에 국내주식의 위치도 달라졌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231조6000억원의 운용수익을 거두며 18.82%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기금 적립금은 1458조원으로 늘었다. 자산군별로는 국내주식 수익률이 82.44%에 달해 전체 성과를 강하게 견인했다. 해외주식은 19.74%, 대체투자는 8.03%를 기록했다.
국내주식 급등은 연기금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목표비중을 넘긴 자산을 기계적으로 팔아 비중을 맞출 것인지, 아니면 한국 증시의 기대수익률 자체가 높아졌다고 보고 목표비중을 조정할 것인지다. 발표자료는 코스피 상승으로 주요 연기금의 국내주식 보유 비중이 자연스럽게 확대됐고, 코스피 리레이팅이 이어질 경우 국내주식 목표비중과 허용범위를 상향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다.
결국 다음 자산배분 전략은 특정 자산군을 일방적으로 늘리거나 줄이는 문제가 아니다. 대체투자는 양적 확대에서 선별과 위험관리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국내주식은 과거 저평가 시장이라는 전제에서 벗어나 리레이팅 가능성을 반영해야 한다. 해외투자는 장기 수익률과 환율 영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TPA 논의가 등장한다. TPA는 자산군별 칸막이에 맞춰 비중을 관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전체 포트폴리오의 위험과 수익을 기준으로 투자 대상을 조정하는 체계다. 기금의 장기 부채, 위험감내도, 시장 영향, 투자 기회 집합을 함께 고려한다는 점에서 기존 정태적 자산배분보다 유연하다.
TPA 도입/미도입 기관 평균 수익률. [이미지=자본시장연구원]
실제 해외 사례에서도 TPA 도입 기관의 성과가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분석이 제시됐다. 지난 2023년 8월 기준 TPA 도입 기관의 10년 연평균 수익률은 8.6%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TPA를 도입하지 않은 566개 연기금의 연평균 수익률은 7.2%였다. 단순 수익률 차이만으로 운용체계의 우열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산군별 비중 관리보다 전체 포트폴리오 차원의 위험조정성과를 높이는 접근이 글로벌 연기금 운용에서 주목받는 배경이다.
연기금은 이미 잘 벌고 있다. 하지만 잘 벌었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같은 방식이 통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체투자가 강했던 시기와 국내주식이 성과를 이끈 시기, 그리고 주식과 채권의 분산효과가 약해지는 시기가 겹치면서 연기금 운용의 방정식은 더 복잡해졌다.
이번 심포지엄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연기금의 경쟁력은 더 이상 특정 자산군을 많이 담는 데서만 나오지 않는다. 커진 기금 규모와 달라진 시장 환경 속에서 어떤 자산을, 어떤 위험 기준으로, 어떤 시간표에 따라 나눠 담을지가 성과를 가르는 시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