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장을 위해 빌려준 돈은 생산적이고 아파트를 사는 데 빌려준 돈은 비생산적인가. 벤처기업 주식에 투자하면 생산적이고 우량기업 회사채를 사면 그렇지 않은가. AI 데이터센터 대출은 생산적이고 상가 대출은 비생산적인가. 코스닥 상장사에 투자하면 생산적이고 미국 주식을 사면 비생산적인가.
이재명 정부가 금융정책의 간판으로 앞세운 ‘생산적 금융’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면 결국 앞서와 같은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정부는 ‘생산적 금융’을 내세워 자금 흐름을 부동산에서 첨단산업과 자본시장으로 돌리고 있지만, 무엇이 생산적인 금융인지를 정부가 미리 정해 자금 배분에 개입하는 데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미지=더밸류뉴스 | AI 생성]
취지는 그럴듯하다. 부동산에 묶일 자금을 기업과 첨단산업으로 돌리자는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이를 ‘생산적 금융으로의 대전환’이라고 명명하고, 첨단·벤처기업과 지역경제로 시중자금의 ‘물꼬를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문제의식은 이해할 만하다. 한국 가계자산은 부동산 비중이 높고 은행은 담보대출에 익숙하다. 벤처와 혁신기업에는 장기 위험자본이 부족하다. AI·반도체처럼 국가 간 산업전쟁이 벌어지는 분야를 시장에만 맡기기도 어렵다.
그런데 정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정부는 자금이 어디에 가지 말아야 하는지 정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정하기 시작했다. 바로 여기서 ‘생산적 금융’의 허와 실이 갈린다.
◆ 누가 생산적인 금융을 결정하는가
정부는 올해 가계대출 증가율을 1.5% 이내로 관리하기로 했다. 다주택자와 임대사업자의 수도권·규제지역 아파트 담보대출 만기연장도 제한했다. 금융위원회는 ‘부동산 시장과 금융의 절연’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반대편에서는 수도꼭지를 열었다. 국민성장펀드는 150조원이다. AI·반도체·바이오·로봇·이차전지 등 첨단전략산업에 자금을 공급한다. 75조원은 첨단전략산업기금, 나머지는 금융회사와 연기금, 국민 등 민간자금으로 채운다. 정부 재정은 후순위로 참여해 민간보다 위험을 먼저 부담할 수도 있다.
증권사도 예외가 아니다. IMA(종합투자계좌)와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의 모험자본 공급 의무비율을 높이고 부동산 운용한도는 낮추는 방향이다. 금융당국은 금융지주·증권·보험·정책금융기관과 ‘생산적 금융협의체’를 열어 추진 실적을 점검한다.
금융위는 올해 5월까지 금융권이 생산적 분야에 약 150조원을 공급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긴다. 돈을 잘 굴렸는지가 아니라 정부가 정한 곳으로 얼마나 옮겼는지가 정책 성과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는 점 때문이다.
반도체 기업에 1조원을 빌려줬다가 3000억원을 떼이면 생산적 금융인가. 무주택 직장인에게 주택구입자금 5억원을 빌려줘 30년 동안 원리금을 꼬박꼬박 받으면 비생산적인 금융인가.
정부가 ‘생산적’이라는 이름표를 붙였다고 돈까지 생산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생산성은 돈이 투입된 뒤 얼마나 부가가치를 만들고 위험에 비해 얼마의 수익을 냈는지로 확인된다.
생산성은 정부가 사전에 수여하는 훈장이 아니라 시장이 사후에 매기는 성적표다.
◆ 생산적 금융과 관치금융 사이
금융당국도 이런 위험을 알고 있다. 금융위는 “‘무늬만 생산적 금융’이 되지 않도록” 금융회사의 조직과 인력을 확충하고 KPI(핵심성과지표)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생산적 금융 실적을 KPI로 만들수록 금융회사는 정부가 인정하는 자산을 더 많이 찾아야 할 유인을 갖게 된다.
은행원이 반도체 기업과 일반기업 대출을 놓고 고민한다고 해보자. 수익성과 위험이 비슷하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정부가 실적을 점검하고 회사 KPI까지 생산적 금융에 맞춰져 있다면 그의 선택은 자명해진다.
금융회사의 판단은 “이 기업이 돈을 갚을 수 있는가”보다 “이 대출은 생산적 금융으로 인정받는가”에 기울 위험이 생긴다.
이것이 생산적 금융이 관치금융으로 변할 수 있는 경계선이다.
한국금융연구원도 생산적 금융의 성공에는 은행이 좋은 대출처를 가려내는 ‘선별 능력’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성공한 대출의 이익은 인정하되 실패한 대출에는 자기책임 원칙이 적용돼야 시장규율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골라주는 산업보다 은행의 선별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 150조원이라는 숫자의 함정
국민성장펀드도 마찬가지다. 150조원을 조성했다는 것은 '실탄'을 마련했다는 뜻이지 목표 과녁에 적중했다는 뜻이 아니다.
10년 뒤 그 돈이 더 큰 가치를 만들었음이 입증돼야 비로소 성공일 것이다. 반대로 부실기업과 과대평가된 벤처에 흘러들어 손실이 쌓인다면 150조원은 정책 실패의 규모로 전락할 수 있다.
더구나 정부가 후순위로 참여해 민간보다 위험을 먼저 부담하면 투자자의 계산법도 달라진다. 기업이 정말 좋아서 투자하는 것과 정부가 위험을 덜어주기 때문에 투자하는 것은 같은 투자가 아니다.
마중물은 펌프가 작동할 때까지만 필요하다. 마중물이 계속 필요하다면 그 우물에 정말 물이 있는지부터 의심해야 한다.
국민연금 역시 원칙만큼은 분명해야 한다. 지난 5월 국내주식 목표비중을 14.9%에서 20.8%로 높인 결정에는 국내 증시의 구조 변화 가능성과 장기 수익성·안정성, 리밸런싱에 따른 시장 영향 등을 고려했다는 별도의 운용 논리가 있다. 이를 무조건 정부의 증시부양책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무리일 수 있다.
다만 국민연금의 돈은 국민의 노후자금이다. 국내주식의 위험 대비 수익률이 좋으면 사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자산을 사는 것이 기금운용의 기본 원칙이어야 한다. 산업정책이나 증시 부양이라는 목적이 연금의 투자 판단에 앞서기 시작한다면 본래 목적과 충돌할 수 있다.
◆ 돈은 정부 구호보다 수익률을 따른다
정부가 정말 주목해야 할 지점은 따로 있다.
자본시장연구원과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연구진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세금과 기회비용 등을 고려한 가계자산의 세후 수익률에서 서울 부동산이 가장 높았고, 자산가일수록 해외주식 선호가 뚜렷했다. 국내주식은 해외주식보다 장기보유 매력도가 낮았다.
국민은 왜 부동산으로 가는가. 왜 미국 주식을 사는가.
돈이 그쪽으로 갈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세후 수익률과 성장성, 위험, 주주환원 등을 따져 자산을 선택한다. 그런데 정부의 해법은 자꾸 돈의 출발점에서 나온다. 주택대출을 조이고 국내주식에는 혜택을 준다. 금융회사 규제를 바꿔 벤처와 기업으로 돈을 보내고 정책펀드에는 재정을 후순위로 넣는다.
돈이 왜 그곳으로 가지 않는지를 알아내 그 원인을 고치기보다 가지 않는 돈을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는 방식이다. 순서가 거꾸로다.
◆ 정부가 손을 놓아도 돈이 흘러야 한다
출범 1년여를 지나면서 생산적 금융도 이제 전환이 필요하다. 정부가 먼저 재검토해야 할 것은 ‘얼마를 공급했느냐’를 정책의 주요 성적표로 삼는 방식이다. 국민성장펀드 150조원이나 생산적 금융 공급액보다 몇 년 뒤 해당 기업의 수익률과 부실률, 매출과 고용, 민간 후속투자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정부가 빠진 뒤에도 민간자본이 계속 들어와야 그때 비로소 정책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정부의 역할도 돈의 목적지를 지정하는 데서 투자환경을 조성하는 쪽으로 옮겨야 한다. 금융회사가 좋은 기업을 골라낼 수 있도록 기술평가와 정보 인프라를 강화하고, 국내주식으로 돈이 들어오길 원한다면 기업지배구조와 주주환원, 부실기업 퇴출을 개선해 오래 보유할 이유부터 만들어야 한다. 산업정책은 정책금융으로 추진하되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같은 노후자금에는 수익률과 안정성이라는 원칙을 지켜줘야 한다.
생산적 금융의 출발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부동산 담보에 치우친 금융을 기업과 혁신산업으로 돌리자는 문제의식도 필요하다.
문제는 ‘생산적’이라는 단어가 너무 매력적이라는 데 있다. 누가 비생산적인 금융을 하자고 말하겠는가. 그래서 이 말은 대출규제도, 정책펀드도, 금융회사의 자산배분 개입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생산적인 곳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곳에 돈이 흘러갈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기업이 좋은 수익을 내면 주식으로 돈이 간다. 혁신기업이 경쟁력을 갖추면 벤처자금이 몰린다. 국내시장이 미국시장만큼 매력적이면 국민은 굳이 환전까지 해가며 미국 주식을 사지 않는다.
정부는 생산적 금융을 통해 시중자금의 ‘물꼬를 전환’하겠다고 했다.
이제 물어볼 때가 됐다.
물꼬를 튼 것인가, 물의 흐름을 거슬러 억지로 돌리고 있는 것인가.
생산적 금융의 다음 단계는 돈의 물줄기를 더 세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손을 놓아도 돈이 그쪽으로 흐르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생산적’이라는 수식어를 떼어도 생산적인 금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