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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1980년대 대학 풍경과 낭만이 궁금하다면? 최영미 장편소설 <청동정원>

  • 기사등록 2017-07-09 1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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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밸류뉴스=박정호 기자]

<청동정원>은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의 각 분야에서  '기성 세대'로 자리잡은 운동권 출신들의 대학 시절 풍경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은 이들의 대다수가 현실순응주의자가 됐지만 이들의 젊은 시절은 낭만, 저항 정신. 문제 의식으로 가득차 있었음을 보여준다. 


<청동정원>. 최영미 지음. 은행나무 펴냄

청동정원


다음은 이 책에 나오는 주요 문장이다. 


- 인문대 1동 뒤편에 꽃나무와 바위에 에워싸인 둥근 연못이 있었다. 아침이면 물안개가 자욱해 '자하연'이라 불렸다. 물빛이 탁하고 자위에 심어진 관목들이 어려, 새로 조성된 아파트 단지의 조경처럼 어설픈 기색이 역력했다. 건물들에 둘러싸인 연못은 대낮에도 해가 들지 않아 어두웠다. 어두운 연못이 어두운 청춘을 위로해주었다. 그 옆에 혼자 서 있어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다. 물이 얼마나 깊은지,잉어가 몇마리 사는지, 인공연못인지 자연의 일부인지, 고인 물인지 흐르는 물인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 '도다부'(도서관 다과부)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머리를 식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도다부에서는 귤과 빵을 팔았다.


- 학생식당의 백반은 600원이었던가? 700원이었던가? 하여간 분명 1,000원은 넘지 않았다. 정부미 밥알이 푸석푸석 맛이 별로 없었다. 교직원 식당은 비쌌지만 맛은 없었다.


- '강건너'라고 불리던,관악산 유원지 입구에 엉성하게 터를 잡은 야외 주막이 있었다. 강거너는 교내 술집이나 다름 없었다. 교문을 나설 필요없이 학교와 유원의 경계를 띠라 흐르는 개울을 건너면, 술상이 차려진 마루가 보였다. 파쇼, 투쟁, 광주같은 무시무시한 말들이 허름한 탁자를 오갔고, 나는 묵묵히 선배들이 주는 술을 받아 마셨다. 


- 신림동 사거리의 '선비촌'은 가장 유명한 막걸리집이었다. 녹두거리. 상거 건물의 2층 중국 음식점은 왁자지껄한 학생 손님들에게 점령당했다.


- 이대 입구 앞으로 원정 미팅을 갔다. 이화여대 경영학과 남보현(가명). 나의 첫 미팅 상대. 나는 지금도 그 이름을 잊지 못한다. 여자들은 손수건, 지갑 같은 소지품을 내놓고 남자들은 고른다. 어머나하는 탄성이 일고...


- 우리의 대화의 주제에 돈은 '없었다'. 당시 우리는 어마어마하게 순수했다. 개인의 이익을 취한다고 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명예였다.  이념만이 전부였다.  돈 이야기는 없었다. 대학 교재에는 위대한 문장은 널려 있었지만 돈 이야기는 단 한줄도 없었다.  '진리는 나의 빛'(VERI TAS LUX MEA)은 있었으돼 돈 이야기는 없었다.


- 집안이 잘 산다는 것은 당시에는 수치스러운 일이어서 부자집 친구는 그 사실을 숨기던 시절을 지금의 세대는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돈이 있으면 편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느꼈지만.... 나도 신문지로 도배한 흙방에서 살았었다며 '출신 성분'을 자랑하던 시절이었다.


- 마르크스가 친구나 가족보다 더 친근하던 시절이었다.  무한궤도로 대학가요제에 출전햇다는 이유로 어느 동문이 '파쇼'소리를 듣던 그런 시절이었다.


- 공장에 위장취업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다. 어떻게 대학생 신분을 위장하고 공장 노동자로 취업할 수 있는지를 연구했다. 거기에는 그 어떠한 나의 이기심도 없었다. 그것은 순수한 연대의식이자 정의의 발로였다.


- 70년대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전혜린과 <데미안>의 헤르만 헤세가 대학가를 풍미했다면 80년대는 마르크스와 구호가 대학가를 풍미하던 시절이었다.


- 역사철학회, 경제철학회, 대학문화연구회, 사회복지연구회, 경제법학회, 흥사단아카데미, 후진국경제연구회가 있었다.


- "모든 것을 의심하라"며,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꿰차고 있던 것처럼 보이던, 신비로운 아우라를 풍기던 그 선배는 지금 무얼하고 있을까?


- 김민석 총학생회장의 어머니는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은 이제 끝난 몸이지만, 여러분이 내 아들의 뜻을 이어주기 바랍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됐고, 떠오르는 정치인이 됐다. 나는 김민석 의원을 볼 때 총학생회장 시절의 그 순수한 눈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 신림동 자취방 바닥에 둘러 앉아 혁명론을 공부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방되지 않고는 스스로도 해방될 수 없다".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싸르트르의 문장이 나를 붙잡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자유인으로 살겠다'가 내 모토였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해방되지 않으면 나도 자유롭지 않다니... 이제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하는 시대였다. 이 지극히 단순한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던 시대가 한국의 1980년대였다.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공통된 원죄는 '나는 거기에 없었다'였다. 대학 근처에 있던 그 누구도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 소련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소련이 해체되자 나는 혼자였다. 레닌의 동상이 끌어내려지는 것을 보며 나는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알고 싶었다. 충격을 나눌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소련의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우리의 이념은 여전히 유효하다ㄱ고, 이론은 잘못됐지만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이념은 영원하다고, 그네들의 실험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잘 할 수 있다고, 서로 위로하며 의지할 동지가 옆에 없었다. 번듯한 직장도, 집도 없는 나는 남편도, 애인도, 아이도 없는 서른살의 독신녀이자 실업자였다. 신림동의 좁아터진 고시원을 벗어날 기회가 내게 왔을 때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됐다. 대한민국의 신문과 방송이 공산주의의 종말을 선언할 때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고 토란해다는 혐의로 교도소에 가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서른세살의 직업적 혁명가 -거의 직업이 혁명인 - 김주은 한국에서의 사회주의는 지금 시작이라고, 마르크스와 레닌을 연구해 제대로 된 혁명을 모색해야한다고 믿었다. 


-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을까? 공산주의의 대전제는 서로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을 조절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과소평가했다는 치명적 약점 때문에 세상에서 몰락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시작한다. 이 것이 두 이념의 승패를 갈랐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팔기 위해서 인간의 없는 욕망도 만들어낸다.


- 나는 약자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배웠다. 마르크스가 호소력있게 다가온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 이념이 사라지자 나는 순식간에 돈벌이에 내몰렸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변변한 능력도 경력도 없는 우리는 서른살의 문턱에서 걸음마를 배워야 했다. 80년대가 저물어가는 가을이었다.


pjh@thevalu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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