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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연 칼럼] AI 시대의 전력 병목, 왜 전선에서 막히는가

- 구리 가격 1년 새 두 자릿수 상승…AI 전력 인프라 비용 압박 확대

- 미국 전력망 70% 노후화…송전선 교체만 수백조원 시장

- LS전선·대한전선, 턴키 역량으로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조준

  • 기사등록 2026-02-09 08: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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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밸류뉴스=박수연 선임기자]

1980년대 중반, 안양 호계동 금성전선 공장에 미국 조지아주에 본사를 둔 사우스와이어(Southwire) 파견 기술자들이 구리선 연속 주조·압연(Continuous Casting & Rolling) 설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한국 엔지니어들은 이 공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1950년 설립된 사우스와이어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구리 가공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었다. 한국 전선 산업은 그 기술을 ‘도입’하는 위치에 있었고, 격차는 분명했다.


22년 뒤, 구도는 뒤집혔다. 2008년 LS전선(구 금성전선, 전 LG전선)은 북미 최대 전선사 수페리어 에식스(Superior Essex)를 인수하며 글로벌 전선 산업의 핵심 플레이어로 올라섰다. 생산 설비뿐 아니라 설계, 품질 관리, 글로벌 영업 네트워크까지 흡수한 이 인수는 한국 전선 산업이 ‘추격자’에서 ‘경쟁자’로 이동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4월 28일, 미국 버지니아주 체서피크시. LS전선 해저케이블 공장 착공식장에 모인 미국 정치인들 앞에서 릭 웨스트 시장은 ‘1 LS Way’라고 적힌 도로 표지판을 구본규 사장에게 건넸다. 총 6억8000만달러(약 1조원)가 투입되는 북미 최대 해저케이블 공장 진입로에 한국 기업 이름을 공식 도로명으로 부여한 것이다. 공화당 주지사와 민주당 상원의원이 나란히 박수를 보내는 장면은, 40년 전 미국 기술을 배우던 금성전선 공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박수연 칼럼] AI 시대의 전력 병목, 왜 전선에서 막히는가한국 전선업계가 ‘가격 경쟁 산업’에서 ‘신뢰 기반 인프라 산업’으로 이동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맞았다. [이미지=더밸류뉴스 | AI 생성] 

현재 한국 전선업계는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런던금속거래소(LME) 기준 구리 가격은 최근 톤당 1만3000달러 선을 웃돌며 고점권에서 움직이고 있다. 기준 시점에 따라 상승률 산정에는 차이가 있지만, 지난해 초 대비 두 자릿수 상승이 누적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공급 측면에서는 콩고 카모아-카쿨라(Kamoa-Kakula) 광산 일부 구역의 침수·배수 이슈, 인도네시아 그라스버그(Grasberg) 광산의 지난해 하반기 지하 사고에 따른 생산 차질 등으로 변동성이 확대됐다. 칠레·페루 지역의 구조적 생산 제약까지 겹치며 구리 공급망은 점점 더 빡빡해지고 있다.


수요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AI 데이터센터, 전기차, 재생에너지 설비가 동시에 전력을 빨아들이며 구리 소비는 구조적 상승 국면에 진입했다. 올해 연간 계약 기준 정련 구리(캐소드) 프리미엄은 톤당 325~350달러 수준이 제시되고 있다. 지역과 계약 조건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프리미엄이 역사적 고점권에 진입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글로벌 전선업계가 원가 압박에 흔들리는 지금, 한국 기업들은 오히려 이 국면을 기회로 본다. 원자재 가격이 높을수록, 설계·시공·납기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기업만이 고부가 프로젝트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미국 전력망 70%가 25년 이상…연결 지연이 키운 ‘전선’의 구조적 병목


미국 전력망 인프라는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 미 에너지부(DOE)에 따르면 미국 송전선의 약 70%가 25년 이상 사용된 설비다. 상당수는 1960~1970년대에 건설됐으며, 대형 변압기의 평균 사용 연령도 40년을 넘어섰다. 노후 설비 비중이 높아지면서 전력망은 새로운 수요를 흡수할 여력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박수연 칼럼] AI 시대의 전력 병목, 왜 전선에서 막히는가미국 전력망 노후화 현황. [자료= 미국 에너지부(DOE)]

문제는 이 와중에 전력 수요가 구조적으로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조업 리쇼어링과 산업 전기화, AI 데이터센터 확산이 동시에 진행되며 발전 설비 증설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발전 능력 확대가 곧바로 전력 공급 확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전력망이 이를 받아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병목은 ‘발전’이 아니라 ‘연결’에서 발생한다. 신규 발전 프로젝트가 실제로 전력망에 연계되기까지는 4~5년이 소요되는 사례가 흔해졌다. 환경영향평가와 인허가, 토지 수용 문제가 겹치며 전력망 연결 대기 물량은 빠르게 쌓이고 있다. 전력을 만들 수 있어도, 흘려보낼 길이 막혀 있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병목은 점점 송전선과 해저케이블로 수렴된다. 장거리·고전압 송전을 담당하는 케이블은 설계부터 제작, 시험, 포설까지 수년이 걸린다. 특히 해저 HVDC 케이블은 확보 시점 자체가 프로젝트 착공 시점을 결정할 정도로 일정에 결정적이다. 전선은 더 이상 단순 자재가 아니라, 프로젝트 전체의 시간을 좌우하는 변수가 됐다.


미 정부와 민간이 전력망 투자 확대에 나서고 있지만, 제도와 인허가의 속도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 간극 속에서 발주처들이 가장 먼저 확보하려는 것은 ‘확실한 전선 공급망’이다. 납기와 품질, 시공까지 책임질 수 있는 전선사가 각광받는 이유다. 미국 전력망 문제의 끝에서, 전선이 구조적 병목으로 부상한 배경이다.

[박수연 칼럼] AI 시대의 전력 병목, 왜 전선에서 막히는가미국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전망. [자료= IEA(Energy and Al, 2025), Pew Research Center(2025)]


◆ LS전선·대한전선, 턴키 역량과 품질로 글로벌 승부수


전선 산업의 경쟁 구도는 이미 ‘누가 더 많은 케이블을 싸게 만드느냐’의 문제를 넘어섰다. 대형 송전 프로젝트일수록 발주처가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제품 공급이 아니라, 설계 단계부터 시공 완료까지 전 과정을 책임질 수 있는 수행 능력이다. 특히 HVDC와 해저케이블 프로젝트에서는 공정 하나라도 어긋날 경우 전체 일정이 수개월 단위로 밀릴 수 있어, 턴키(Turn-key) 역량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조건으로 자리 잡았다.


이 같은 변화는 최근 업계 전반에서 뚜렷하게 감지되고 있다. 과거 전력 기자재 시장에서 가격과 사양이 주요 경쟁 요소였다면, 최근 발주 논의에서는 납기 준수 이력, 시공 경험, 장거리·고전압 프로젝트 수행 실적이 먼저 거론된다. 이는 발주처가 기술 사양보다 ‘프로젝트 실패 가능성’을 더 크게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LS전선은 이 지점에서 가장 많은 레퍼런스를 보유한 기업 중 하나다. 말레이시아 전력공사 TNB의 해저 전력망 프로젝트를 턴키 방식으로 수주한 것은 단순한 해외 계약이 아니라, 설계·자재 공급·포설·시공을 일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국제적으로 검증받았다는 의미다. 국내에서는 제주-진도, 제주-완도, 북당진-고덕, 동해안-신가평 등 주요 HVDC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고전압·장거리 송전에서의 품질 관리 경험을 축적해왔다. 특히 500kV급 고온형 HVDC 케이블 상용화는 장거리 송전의 손실과 신뢰성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사례로 평가된다.


대한전선의 전략은 ‘수직 통합’에 가깝다. 영국 내셔널그리드의 HVDC 해저케이블 프레임워크에 선정된 것은 기술력뿐 아니라 장기 공급 안정성과 프로젝트 관리 능력을 동시에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이 프레임워크는 향후 영국 해상풍력과 대륙 간 전력 연계 프로젝트의 핵심 인프라를 포괄한다. 당진 해저 2공장 증설, 해저 시공 전문 역량 내재화, 전용 포설선 운영까지 더해지며 대한전선은 설계부터 시공, 유지보수까지 전 주기를 책임질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제 경쟁의 기준은 명확하다. 단가가 아니라 누가 실제로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완수할 수 있는가다. 이는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라, 프로젝트 수행 경험과 리스크 관리 능력의 문제다.


◆ 구리 대란 속 한국의 선택…속도·납기·신뢰의 싸움


구리 가격 급등은 전선 산업의 원가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는 단순한 비용 상승 이슈에 그치지 않는다. 구리가 비쌀수록 발주처의 시선은 ‘가격’에서 ‘확실성’으로 이동한다. 프로젝트 지연으로 발생하는 손실이 자재 가격 변동을 훨씬 웃돌기 때문이다.

[박수연 칼럼] AI 시대의 전력 병목, 왜 전선에서 막히는가LME 구리 가격 추이. [자료= Trading Economics, Investing.com]

AI 데이터센터와 대규모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업계에서는 데이터센터 1MW당 27~33톤의 구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수백 MW급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한 곳에만 수천 톤의 구리가 투입된다. S&P글로벌마켓인텔리전스는 2040년까지 구리 수요가 최대 50% 증가하고, 연간 최대 1000만 톤의 공급 부족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공급이 빠듯해질수록, 납기와 품질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는 기업만이 선택받는다.


이 과정에서 전선 산업 내부의 ‘언어’도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가격 인상 여부와 원가 전가가 주요 논의였다면, 최근에는 발주 일정에 맞춰 실제 물량을 언제 공급할 수 있는지, 해저 시공까지 포함해 리스크를 얼마나 흡수할 수 있는지가 핵심 화두로 떠올랐다. 이는 시장이 전선을 더 이상 범용 자재가 아니라, 프로젝트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환경에서는 단순 케이블 제조사보다, 프로젝트 전체를 관리할 수 있는 전선사가 유리하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자재 조달, 시공 일정, 품질 인증까지 일괄 관리할 수 있어야 원가 변동성과 공급 리스크를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전선업계가 턴키 역량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향후 3~5년은 한국 전선업계의 위상이 결정되는 시간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유럽의 전력망 현대화, 해상풍력 확대, AI 데이터센터 증설이라는 거대한 수요 곡선이 동시에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장에서 살아남는 기업은 가장 싸게 파는 기업이 아니라, 가장 빨리 납기를 지키고, 문제가 생겼을 때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기업일 것이다. 구리 대란은 위기이지만, 동시에 한국 전선업계가 ‘가격 경쟁 산업’에서 ‘신뢰 기반 인프라 산업’으로 이동할 수 있는 드문 전환점이기도 하다. 이 기회를 구조적 경쟁력으로 만들 수 있는지는, 이제 기업의 선택에 달려 있다.


ynsooyn@thevalu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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