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준 황기수 기자
'弟不如兄'(제불여형).
‘형 만한 아우 없다’는 고사성어다.
그러나 국내 재계에서 이 성어가 통하지 않는 케이스가 있다. 바로 금호석유화학그룹(회장 박찬구)이다. 박찬구 금호석화 회장은 자신의 형 박삼구 회장이 경영하던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2015년 계열분리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한때 재계 7위에 올랐던 호남 최대 기업이었다.
그로부터 9년이 흘렀다. 이제 재계에서는 '금호(錦湖)=금호석유화학'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을 비롯한 M&A 실패로 사세가 위축된 반면 금호석화그룹은 실적을 개선하며 존재감이 커진 덕분이다.
◆64위(2016)→50위, 7년만에 15단계↑... 계열 분리 이후 실적↑
금호석유화학그룹은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한기정. 이하 공정위)가 발표한 공시대상기업집단 50위를 기록했다. 전년비 한단계 하락했다. 그룹 전체 매출액 9조6920억원, 순이익 1조1020억원으로 전년비 각각 6.31%, 46.79% 감소했다. 계열사는 금호석유화학(이상 상장사), 금호피앤비, 금호리조트, 금호미쓰이화학 등 13개로 전년과 동일했다.
금호석유화학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금호석유화학(대표이사 백종훈)의 연간 매출액과 수익성을 살펴보면 편차가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유화산업이 호황과 불황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대표적 경기변동 산업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5년, 10년 단위의 장기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금호석유화학그룹의 실적은 뚜렷하게 개선되고 있다. 2015년 계열 분리 이후 매출액 연평균증가율(CAGR)은 6.11%이다. 공정위가 발표하는 대기업집단 순위를 살펴보면 계열분리 당시 64위(2016년)였다가 54위(2017년), 55위(2018~2019년), 59위(2020년), 55위(2021년), 49위(2022년)를 거쳐 지난해 50위가 됐다. 2016년 이후 7년만에 15단계 점프한 것이다.
◆비수익 부문 과감히 매각... 선택과 집중으로 사이즈 키워
이같은 성과는 그룹 오너 박찬구 회장의 혁신 경영 덕분으로 분석되고 있다.
박찬구 회장은 고(故) 박인천(1901~1984) 금호그룹 창업주 4남으로 앞서 언급한대로 2015년 12월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계열 분리했다. 당시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이끌던 친형 박삼구 회장이 대우건설, 대한통운을 무리하게 인수하는 것에 반대 의견을 제기하다 갈등을 빚은 것이 계기가 됐다.
박찬구 회장은 계열 분리 이후 수익이 나지 않는 업종은 과감하게 정리하고 고부가가치 화학 제품 개발에 주력했다. 이른바 '선택과 집중 전략'이다. 2020년 2월 반도체 소재 사업을 영위하는 포토레지스트리 부문을 SK머트리얼즈에 매각한 것은 비수익 사업 정리의 일환이다. 한편으로는 본업에 관련된 연구개발에 투자해 2019년 3개 제품이 세계일류상품에 선정되면서 '세계 일류 상품 20개 보유'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세계일류상품은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하고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인증하는 제품으로 글로벌 시장 점유율 5%를 넘고 5위 이내에 들어가는 등의 조건을 통과해야 선정된다. 이 결과 금호석유화학그룹은 재계 50대 기업에 진입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반대의 길을 걸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올해 공정위의 대기업집단에서 제외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룹 매출액의 70% 가량을 차지하는 아시아나항공이 대한항공(대표이사 조원태)에 매각 완료되면 '사이즈'가 급감하기 때문이다. 아시아나항공이 제외되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금호고속, 금호건설, 금호티앤아이 등을 계열사로 갖게 되며, 그룹 전체 매출액은 3조원 안팎이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호석유화학그룹 매출액의 3분의 1에 미치지 못한다. 재계 순위로 따지면 100위권 이내로 추정된다.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완료되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그룹명에서 '아시아나'도 빼야 한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이같은 몰락은 무리한 인수합병(M&A)때문이다. 박삼구 회장은 2002년 박정구(1937~2002) 3대 회장이 급작스럽게 타계하며 그룹 경영을 맡은 이후 사이즈 키우기를 주도했다.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각각 6조4000억원, 4조2000억원에 인수해 단숨해 2006년 기준 재계 7위, 호남 최대 기업에 등극했다. 그렇지만 당시 자산규모가 3조원이 채 되지 않았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인수하느라 8조원에 가까운 차입을 하느라 유동성 위기를 겪었고, 사실상 '그룹 해체'가 시작됐다. 대우건설, 대한통운을 매각한 것은 물론이고 '알짜'로 꼽히던 금호렌터카, 금호타이어도 매각하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사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제 금호석유화학그룹은 범(凡) 금호가(家)를 대표하며 존재감이 높아지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고 박인천 창업주가 1945년 해방 직후 택시 2대로 사업을 시작했고 1960년대 경제개발로 황금노선으로 부상한 서울-광주 여객 사업을 주도하며 호남의 대표 기업으로 성장했다. 1984년 박인천 창업주 타계를 계기로 박성용·정구·삼구·찬구·종구 5형제가 10년씩 그룹 경영을 맡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형제경영'이다. 초기에는 이 원칙이 지켜졌다. 장남 고(故) 박성용(1932~2005) 회장이 총수에 올라 12년간 경영을 맡았다. 1996년 차남 박정구(1937~2002) 3대 회장이 6년동안 그룹을 이끌다 2002년 박삼구 회장이 그룹 총수에 올랐다. 다음은 박찬구 회장 차례였지만 박삼구 회장은 자신의 장남 박세창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여기에다 M&A를 놓고 동생 박찬구 회장과 갈등을 빚었고 이후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몰락과 금호석유화학그룹의 실적 개선은 최고경영자(CEO)의 의사 결정(decision making)이 기업 성패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를 보여주는 케이스로 경영 학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고기능성 합성고무∙수지 개발... '미래 먹거리' 탄소나노튜브(CNT) 강화
최근 들어 금호석유화학그룹은 들쭉날쭉한 유화 산업의 경기 변동을 극복하고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는 전략에 주력하고 있다. 금호석유화학그룹이 미래 먹거리로 육성하고 있는 탄소나노튜브(CNT)는 탄소덩어리에서 나오는 신소재로 철의 100배에 이르는 인장강도와 구리의 1000배의 전기전도성을 가진 석유화학업계에서 ‘꿈의 소재’로 불린다. 바이오 센서, 반도체, 자동차, 항공기 등는 물론이고 이차전지(배터리) 소재로도 쓰인다.
금호석유화학은 일찌감치 탄소나노튜브 기술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2005년 탄소나노소재 특허와 제조기술을 확보했고, 이후 삼성전자의 자회사 세메스의 탄소나노튜브 사업부를 인수, 2013년에는 생산공장을 완공했다.
금호석화는 생산 케파(Capa) 증가를 통한 역량을 키운다는 방침이다. 2018년 120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이후 올해 상반기에는 여수 율촌산단에 360톤의 공장을 준공해 3배 이상의 케파를 확보하겠다는 계산이다. 추가로 증설을 고려할 수 있는 부지를 율촌산단에 확보했다.
◆박찬구 회장, 경영 복귀하며 '조카의 난' 해결 나서
박찬구 회장은 지난해 10월 경영에 복귀했다. 앞서 2021년 5월 대표이사를 비롯한 등기이사에서 물러난 지 2년여만의 일이다.
박찬구 회장의 경영 복귀는 조카이자 금호석유화학 1대 주주(8.87%)인 박철완 전 상무를 둘러싼 경영권 갈등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박철완 전 상무는 박정구 전 회장 장남으로 박찬구 회장과는 '삼촌-조카' 사이다. 2021년 금호석화의 배당 확대와 이사 교체 등의 내용을 담은 주주제안서를 발생하며 갈등이 표면화됐다. 이른바 '조카의 난'이다.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안건이 부결됐고 상무이사직에서 해임됐다. 최근 행동주의펀드 차파트너스자산운용에 주주권리를 위임하며 지배구조개선, 경영 투명성 강화 등을 요구하고 있다.
박찬구 회장 슬하의 박준경(장남) 박주형(장녀)은 각각 금호석유화학 사장, 부사장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