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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밸류뉴스=박정호 기자]

<백화점의 탄생>. 가시마 시게루 일본 교리쓰여대 문예학부 교수 지음. 장석봉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2006년 9월 
원제 : : デパ-トを發明した夫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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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화점은 유태인이 처음 만들었다. 18세기 유태인은 처음으로 한 건물에서 여러 종류의 물건을 팔았고, 대중이 대량으로 살 상품을 만들어 팔았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당연시되고 있지만,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구두는 구두 상점에서, 냄비는 철물상에서'라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유태인은 기존 상점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기독교인과 같은 전문점을 열 수 없었다. 그들은 이런 문제를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극복했다.
정뮥점에서 간 다음에 양품점에 가는 식으로, 여러 상점을 돌아다니는 불편을 없애준 백화점은 인기를 끌었다. 또, 백화점은 상품을 대량 매입하기 때문에 그만큼 단가를 내릴 수 있었다.


- 한반도 남단의 소도시에서 막 올라온 소년에게 서울 도심 신세계 백화점의 휘황찬란한 쇼윈도우는 얼마나 충격적이었던가. 또 얼마나 매혹적이었던가. 1984년 겨울의 어느 눈 내리던 저녁... .
나중에 알아보니 이 건물은 서울 중고 소공로(충무로 1가) 신세계백화점 본점이었다. 이 건물은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건물은 1930년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으로 개점했다. 건물의 설계자는 미쓰코시 건축사무소의 하야시 고헤이였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절충식 르네상스 타일 건물. 부채꼴로 펼쳐진 입면에 현관 부분은 전라도산 화강석을 장식조각을 사용했다.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서울에 다녀간 시골 사람이 가장 먼저 받는 질문은 “화신에 가 보았느냐”였다.


- 백화점이란 순수하게 자본주의적인 제도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궁극적인 발현이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더라도 욕망에 의해 산다는 자본주의 고유의 특성은 분명 백화점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P.11)
 
- 맹아기 형태의 자본주의가 지금의 현대적 자본주의로 이행한 시기는 백화점의 탄생기와 일치한다(p.12)


- 19세기 전반만 해도 프랑스 상점을 찾는 고객은 일단 상점의 문턱을 밟은 다음에는 무언가를 사지 않고서는 가게를 나올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그냥 책이나 읽을 목적으로 서점에 들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가격도 표시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손님은 되도록 비싸게 팔려는 상점 주인과 가격을 흥정해야 했다.


- 마가쟁 드 누보테(유행품점)라는 새로운 형태의 상점이 이런 고객에게 불합리한 방식에 종지부를 찍었다. 마가쟁 누보테(MAGASIN DE NOUVEAUTES)란 프랑스어로 '새로운 것들로 가득찬 가게'라는 뜻으로 성 의류 용품을 파는 가게를 말하는데, 이 가게는 이전의 가게와는 다른 방식의 판매 방식을 도입했다. 먼저, 가게 구조가 달랐다. 쇼윈도우는 밝은 조명에 의해 눈부실 정도로 환했고, 널찍하고, 안락했다. 이전의 가게가 우중충하고, 어둡고, 천장이 낮고, 점원이 마치 사냥감을 기다리는 자세로 앉아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 인류는 최초로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을 구경하면서 거리를 걸었다. 스쳐 지나가는 시간은 찰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진열품은 행인의 마음에 지우기 힘든 잔상을 새긴다. 언젠가 행인은 자신에게 내재한 소비 욕망의 명령에 따라 마가쟁 드 누보테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의 등장은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던 1854년, 조르주 외젠 오스망 남작의 대대적인 파리 정비 사업에 따른 결실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가게는 대부분 집안 대대로 이어져온 작은 가게로서 소비자가 물건을 잘 보게끔 진열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 아리스티드 부시코는 1810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벨렝에서 모자 가게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시코는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보내주는 학비를 받아서 파리에서 보헤미안처럼 공부를 하는 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는 글자를 익히자 마자 당시의 관습대로 알고 지내는 노르망디 상인의 가게에서 점원살이를 하는 것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그는 프티 생 토마라는 잠화점의 점원을 옮겼다. 프티 생-토마는 1810년 창업했고, 파리 센 강 좌안의 주택가인 포부르 생제르멩 근처 바크 가에 있었다. 마가쟁 드 누보테라고 한다.


- 부시코는 프티 생-토마가 자기를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프티 생-토마를 필요로 했다. 프티 생-토마의 눈부시게 빛나는 쇼윈도의 매력은 대단했다. 


- 부시코는 프티 생-토마의 점원으로 있던 1836년, 평생 반려자인 마르그리트 게랭과 결혼식을 올렸다. 게랭은 부시코보다 여섯살 아래인 1816년생으로, 프랑스 중부 부르고뉴 지방의 레르쥑스에서 파리로 나와 세탁일을 하다 근처에 있는 치즈가게의 경영을 맡고 있었다. 부시코는 이 가벼운 식사를 제공하는 이 치즈가게에 식사하러 들렀다가 마르그리트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마르그리트의 어머니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박복한 여인 팡틴 처럼 바느질을 하던 중에 마르그리트를 낳았지만 아버지는 누구인지 몰랐다. 


- 부시코는 독학으로 영어를 배웠고, 그 덕에 매장 주임으로 승진했다. 마르그리트는 남편을 지극히 위하는 아내였을 뿐 아리라 치즈가게를 맡을 정도로 야무진 여성이었다. 이 부부는 알뜰살뜰 저축해 종자돈을 모았다.  1852년 부시코 부부는 세브르가와 바크가의 모퉁이에 있던 봉 마르셰(잡화점? 확인요망)의 반을 그동안 모은 5만 프랑으로 매입했다. 프티 생-토마를 그만두고  어엿한 가게 주인으로 독립한 것이다. 이 봉 마르셰는 종업원 12명에 매장수가 4개였고, 연간 매출액은 45만 프랑이었다. 마가쟁 드 누보테로서는 비교적 소규모였지만 부시코 부부가 노력한 결과 1863년에는 연간 매출액 700만 프랑을 기록했다.


-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부시코의 경영 방식에 불만을 가진 공동 경영자 쥐스탱 비도가 자기 지분을 달라고 제안해왔다.


- 1877년 부시코가 세상을 떠났을 때 봉 마르셰는 파리 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백화점으로 성장했다.


- 백화점은 제조업과 소매유통업의 관계도 역전시켰다. 이전까지만 해도 제조업은 '갑'이었다. 다시 말해 만드는 게 문제였지, 일단 만들면 팔렸다. 그런데 백화점은 이 관계를 역전시켜 공장이나 작업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 상품은 매입되는 즉시 판매되고, 판매되는 즉시 사들여지며, 상품이 재고로 잠자는 기간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지금의 백화점 방식은 봉 마르셰 백화점이 도입했다.


- 부시코가 스펙터클란 백화점 건물을 만든 이유는 한가지였다. 여성 고객을 가게로 끌어들여 소비 욕망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여성의 내면에 억제돼 있던 소비 욕망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 그는 백화점 입구를 '연출된 대혼란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는 입구를 일부러 좁게 만들고 입구 주변에 봉사가격 상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몰리도록 했다. 지갑이 얄팍한 사람들이 입구에 몰려들어 입구를 막고, 가게가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던 것이다. 

또, 그는 여성이 찾는 물품들을 매장의 이곳저곳에 분산 배치했다. 사람들은 빈번하게 왔다갔다 할 수 밖에 없었다. 매장은 활기가 넘치는 공간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 가게가 극장이고, 손님이 관객이라면, 오페라는 당연히 상품이다.


- 매장 디스플레이의 기본은 손님이 가게 안으로 한발짝을 들여놓으면 자기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이 막히는 기분을 들게 하는 것이었다.


- 백화점에서 여성 고객이 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물건을 슬쩍 훔치는 일이 이따금씩 발생하는 이유를 생각해봤는가? 백화점의 유혹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다. 봉 마르셰에도 귀부인의 물건 슬쩍하기는 빈번했다.


- 사치품을 살 경우에도 그 행위를 합리화할 수 있는 핑계가 있다면 여성은 꺼리낌없이 지갑을 연다.


- 백화점의 현금판매 방식도 마가쟁 드 누보테가 처음 도입했다. 이전까지의 상점은 손님이 외상으로 물건을 사거나 장기어음으로 지불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그에 해당하는 이자를 받았지만 이 경우 유동성이 나빠지고 고객은 주변의 아는 사람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손님을 고객으로 삼는 전략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 방법이었다.
그리고 현금으로 파는 대신 반품을 인정하는 새로운 판매 방식을 도입한 가게도 있었다. 이것은 상품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 봉 마르셰가 다른 백화점과 가장 달랐던 점은 여러 매장이 봉 마르셰라는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 처럼 완전히 독립된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1882년 36개. 매장에는 한 사람씩 매장 주임이 완전히 독립된 점포처럼 모든 것을 책임지고 처리했다.


- 봉 마르셰는 직원 채용 시스템도 바꾸었다. 봉 마르셰는 당시의 일반적인 인재 교육 시스템인 도제식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았다. 도제식 시스템이란 밑바닥에서부터 상품 지식을 몸에 익혀가는 방식으로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그러나 봉 마르셰는 다른 마가쟁 드 누보테에서 몇년동안 경험을 쌓은 사람 이외에는 채용하지 않았다. 봉 마르셰는 점원 교육의 기초적인 부분은 다른 가게에 맡길 수 있었다. 파리의 의류점에서 근무하는 젊은이들의 꿈은 봉 마르셰의 점원이 되는 것이었다.


- 파리의 상점 점원으로 일하는 젊은이가 인생의 목표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세가지 뿐이었다. 첫째, 고향에 돌아가서 본가의 장사를 잇는다. 둘째, 견습으로 들어가 숙식을 제공받으며 일하다가 그 상점의 사위가 된다. 세째, 자본을 축적해 독립한다. 그런데 봉 마르셰의 성공으로 제4의 길이 열렸다. 그것은 백화점에 입사해 열심히 일해 매장 주임으로 승진하는 것이었다.


- 승진시스템, 종업원지주제, 퇴직금 및 연금제도가 부시코 부부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급여를 올리면 직원은 의욕이 생겨 열심히 일하고 귀속의식이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급여가 높아도 게으름을 피우는 직원은 아주 많다. 직원은 자신이 주주(회사의 주인)이 아니라 피고용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은 월급 사장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의식을 불식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직원을 모두 '주주'로 만들면 된다.


- 1887년 부시코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2만명의 인파가 장례행렬에 참석했다. 부시코 부인은 파리의 대모였다.


pjh@thevalu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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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07-09 12: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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