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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스토리] '한국 도자기 산업의 영광' 행남사, 왜 무너졌나?

- 비즈니스 환경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교훈 남겨

  • 기사등록 2019-01-10 08: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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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밸류뉴스=신현숙 기자]

지난 8일 한반도의 끝자락 전남 목포시 영산로의 행남사 사옥. 소수의 주주와 임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 '임시주주총회'에서 사회자는 미리 준비된 결의 사항을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행남사의 상호 변경, 사내 및 사외 이사 선임, 신규 목적 추가가 주요 안건이었다. 안건은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임시주주총회를 마친 주주와 임직 서둘러 행사장을 빠져 나갔다. 

'청와대 전용 식기 공급 기업', '88올림픽 도자기 식기류 공식 지정 기업', '2007년 남북정상회담 공식 식기 기업'을 비롯해 행남사를 따라다니던 화려한 수식어는 막을 내렸다. 행남사는 법인은 그대로 존속되지만 더이상 예전의 도자기 기업이 더이상 아니다. 행남사는 향후 영화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행남사의 영광과 좌절은 한 시대를 풍미한 기업도 비즈니스 환경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경영 원칙을 되새기게 한다.


행남사의 도자기 제품들. [사진=행남사 홈페이지]


◆ 한국 도자기 산업의 종가(宗家)


행남사는 50대 이후의 세대에게는 영광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기업이다.
행남사는 일제가 한반도를 통치하던 1942년 김창훈(1896~1967) 창업주가 전남 목포에 설립한 업계 최초의 도자기 기업다. 일제의 수탈로 음식 담을 그릇에 대한 수요가 크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식기, 찻잔, 밥그릇 등의 도자기를 생산했다.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행남사는 '최초'라는 수식어를 숱하게 만들어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1953년 국내 최초로 서양 식기를 개발했고, 1957년에는 혁신적인 도자기그릇 본차이나를 자체 기술로 생산했다. 국내 도자기업계에서 처음으로 1963년 수출 길을 뚫어 우리나라 자기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린 것 역시 행남이다.
경기도 여주공장의 한 달 생산량 100만 개는 단일 공장으로 세계 최대 규모였다. 본차이나 원조로 자처하는 영국을 비롯해 세계적 다국적기업들이 앞다퉈 구매할 정도로 품질도 뛰어났다.
청와대, 예멘 대통령궁, 태국 왕실과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각종 정상회담의 식탁을 빛내기도 했다.


이 회사는 기술력과 모범적인 경영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행남사가 1957년 국내 최초로 개발한 본차이나 기술은 종주국인 영국 제품보다 앞선 것으로 평가받았고, 홍콩과 북미 시장에 수출됐다. 1980년에는 베네수엘라에 도자기 공장을 지어주고 기계를 공급했다.


노사 화합도 이 회사의 강점이었다. 김창훈 창업주의 뒤를 이어 경영을 맡은 장남 김준형(1914~2008) 회장은 임직원들과 똑같이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일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에도 행남은 단 한차례의 감원도 없었고, 노조도 쟁의나 분규를 하지 않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를 인정받아 행남은 2011년 노사문화 대통령상을 받았다.
김준형 회장의 장남 김용주(78) 전 회장은 미국 메사추세츠주립대 MBA(경영학 석사)를 마치고 1982년 행남자기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해 선진 경영 기업을 도입했다.


1999년 행남자기 관계자들이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서 직영 판매장 오픈 행사를 열고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 [사진=행남사]

◆ 2000년대 초반부터 실용성 중시 분위기에 도자기 시장 축소 


탁월한 기술력, 리더십을 갖춘 경영진, 헌신적인 임직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행남사의 위기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시장 환경 변화에서 비롯됐다.
2000년대 초반, 국내에 도자기 시장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사회 전반에 실용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에 나타나면서 혼수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던 도자기 세트의 수요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락앤락을 비롯해 밀폐용기가 실용성을 강점으로 행남의 도자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국내 도자기 시작은 2000년대 초반 5000억원을 정점으로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해외 도자기가 국내 시장을 파고 들었다.
저가품 도자기는 중국산이 장악하고 프리미엄 시장은 유럽산이 점유율을 높이기 시작했다. 행남은 중국산에는 가격에 밀리고 유럽산에는 브랜드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행남의 실적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행남사의 매출액 추이. 단위 억원. K-IFRS 별도 기준. [자료=전자공시]

행남사의 지난해 추정 매출액은 95억원으로 2011년 536억원의 5분의 1토막이 나 있다.   

경영 나빠지다보니 유상증자가 빈번하게 행해져 기존 주주들은 지분 가치 희석으로 손실을 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다 지난해 4월에는 무상감자를 실시해 주주들은 큰 손실을 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상감자란 주주에게 돈을 보상하지 않고 주식수를 줄이는 것으로 주주들은 주식수가 줄어든만큼 고스란히 손실을 떠안게 된다.

행남사의 유상증자, 무상증자 내역. [자료=전자공시]

행남은 영업현금흐름도 지속적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영업활동을 통해 '현찰 다발'을 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행남사의 영업현금흐름 현황. 46기=2018년. [자료=전자공시]

◆ 신규 사업, 경영 혁신에도 실패


행남이 위기 타개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김용주 회장의 장남 김유석(48)씨는 2014년 대표이사에 취임해 의료기기, 화장품, 유통 등의 신규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행남은 의료기기 전문 제조사인 진성메디와 중국 CCTV몰 사업자 자격을 보유한 데이터시스를 자회사로 편입했다. 진성메디를 통해 기존 세라믹 기술을 활용한 의료기사업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신규 사업은 모두 실패했다. 잘 알지 못한 분야에서 섣불리 뛰어들어 실수를 거듭한 것이다.
2015년 11월 김용주 김유석 부자는 지분 25.75%(2229만1757주)를 인터넷 기업 덤디어와 진광호씨에게 200억702만원에 매각하고 경영권을 넘겼다. 73년의 역사가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김창훈(1896~1967)-> 김준형(1914~2008)-> 김용주(78) -> 김유석(48)으로 이어지는 4대 경영도 막을 내렸다.


행남사의 영광과 몰락은 비즈니스의 세계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떠올리게 한다. "모든 기업은 언젠가는 문을 닫는다. 다만 그 시기를 연장할 뿐"이라는 격언도 되새기게 한다. 10일 현재 행남사의 시가총액은 929억을 기록하고 있다.


shs@thevalu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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