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통상 압박이 개별 기업과 상품을 넘어 한국의 법제와 산업정책 자체를 겨냥하면서 정부와 국회의 선제적 대응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8일 발간한 '미국 관세정책의 판단 대상 확대와 국내 법제의 통상리스크' 보고서에서 미국이 무역법 제301조와 무역확장법 제232조 등을 활용해 노동·산업정책·공급망·투자구조를 관세정책과 연계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 로고 [이미지=국회]
특히 지난 2월 미 연방대법원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한 상호관세를 위법하다고 판단한 이후 미국이 개별 통상법을 활용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 입법조사처의 분석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강제노동 301조’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12일 한국을 포함한 60개 경제권을 대상으로 강제노동 생산품의 수입금지와 실효적인 집행 여부에 대한 제301조 조사에 착수했다.
주목할 대목은 미국이 특정 한국산 제품에 강제노동이 사용됐는지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이 제3국에서 생산된 강제노동 상품이 국내로 유입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수입규제체계와 집행수단을 갖추고 있는지가 판단 대상에 포함됐다.
7월23일 최종 조치에서도 각국의 강제노동 수입금지제도 도입 여부와 통상협정상 약속 등이 관세율과 면제 범위에 반영됐다. 한국·일본·스위스에는 12.5% ‘net of MFN’ 방식이 적용됐고 EU와 대만에는 10%가 적용됐다.
입법조사처는 이 같은 미국의 정책 변화에 비춰볼 때 한국 법제에 취약점이 존재한다고 진단했다. 현행 관세법 제234조의 수출입 금지품목에는 노동 관련 사유가 포함돼 있지 않고, 대외무역법 역시 강제노동 생산품에 특화된 조사·통관 절차를 별도로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강제노동의 정의와 판정기준부터 해외 생산과정 조사, 공급망 추적, 통관 보류와 반입 배제, 수입자의 소명 및 구제절차에 이르기까지 실제 국경 집행으로 연결되는 제도적 사슬에 공백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입법조사처는 미국의 요구에 맞춰 곧바로 강제노동 수입금지제도를 도입하기보다는 산업계에 미칠 영향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 중간재 의존도가 높은 산업의 경우 공급망 추적과 공급선 변경 비용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관세 판단 대상 확대는 강제노동에 그치지 않는다. USTR은 지난 3월11일 한국과 중국, EU, 일본 등 16개 경제권을 대상으로 제조업의 구조적 과잉생산에 관한 제301조 조사도 개시했다. 무역흑자와 유휴생산능력뿐 아니라 정부 보조금, 정책금융, 시장접근 장벽 등 각국의 산업정책이 조사 대상에 포함됐다.
무역확장법 제232조 역시 미국의 제조기반과 핵심 공급망을 국가안보 문제와 연결하는 방향으로 활용되고 있다. 최근 반도체와 폴리실리콘 관련 조치에서는 미국 내 투자·생산 여부와 수입품의 최종 용도 등이 관세 감면이나 예외를 판단하는 변수로 부상했다.
이에 따라 한국도 미국의 관세 발표 이후 대응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국내 법률과 산업정책을 만드는 단계부터 통상리스크를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입법조사처는 정부가 미국의 무역장벽보고서(NTE), 제301조·제232조 조사 등을 상시 모니터링하고 산업별 국내 법제와 정부 지원, 공급망 구조, HS코드별 실효 관세 부담, 대미 투자와 공급망 기여도 등을 체계적으로 축적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관세리스크가 국내 법제·산업정책·공급망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는 만큼 개별 관세조치에 대한 사후 대응을 넘어 정책·입법 단계에서 통상리스크를 사전에 점검하는 관리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