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문 건축 및 공간디자이너·문화평론가·비평연대
나는 강원도 출신의 촌놈으로, 제법 많은 초록과 제법 낮은 벽들을 보며 커왔다. 이런 내가 상경해 빌딩 속에 보금자리를 잡았으니, 녹음과 작고 소소한 것들에 대한 향수는 나 같은 놈에게나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비싼 월세를 티켓값으로 생각하고, 본전을 찾으러 서울 곳곳의 공간과 건물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은, 이 향수가 비단 시골쥐만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신세대에게 꽤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전문가가 SNS에 소개하는 공간엔 수천 개의 좋아요가 달린다. 수백 개씩 올라오는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절반은 그 배경이 공간이다. 사람들이 찾는 '좋은 공간'에는 감각의 결이 살아 숨 쉰다. 오감 친화적인 휴먼스케일,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드는 감각적 완급. 그 모든 것이 공간에 ‘경험’을 부여하고, 공간을 ‘장소’로 만든다. 오프라인의 장소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오아시스다. 나 역시 낯선 서울에서 나의 장소를 찾아 헤맸다.
그렇게 발견한 나의 첫 장소는 부암동의 A모 레스토랑이었다. 은퇴한 오보에 거장이 직접 한옥을 개조하여 운영하는 조그마한 양식당이다. 내부에는 주인장이 손수 찍거나, 영감을 받은 여러 이미지들이 일정한 레이아웃으로 출력되어 사방에 붙어있다. 어두운 조도, 붉은 색감, 벽의 질감이 사진들과 어우러져 마치 한국 사찰을 수도원의 공간감으로 재해석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곳에서 작은 숭고함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 감정은 내게 공간을 '장소'로 느끼게 했다. 부암동 곳곳엔 이런 특별한 경험을 주는 공간들이 많았는데, 어디서 입소문을 탔는지 지금은 처음 알게된 3년 전보다 유동인구가 눈에 띄게 늘었다.
나에게 부암동 레스토랑이 그랬듯이, 장소는 곧, 계속 머무르고 싶은 곳, 다시 찾고 싶은 곳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 곳이 새로운 핫 플레이스가 되고 신 상권의 중심이 되는 사회가 되었다. 이제는 감각적이고 인간적인 공간 경험이 곧 경제적 전략이 된다. 경험을 파는 공간, 이야기를 품은 장소, 브랜드 철학이 전달되는 무대. 이런 공간은 단지 사람을 모으는 것을 넘어, 도시와 지역, 더 나아가 사회의 생존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신세대가 사회의 주축으로 올라서고 있는 지금, 경쟁력은 ‘사람을 위한 경험’이 되었다. 상품의 진열 개수, 더 화려한 인테리어로 우열을 가리던 시대는 저물었다.
이미 많은 기업과 브랜드들이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듯하다. 최근에 방문한 ‘더현대 서울’은 그 변화를 가장 실질적으로 체감하게 한 공간이었다. 흔히 백화점은 창이 없고 동선과 시선이 상품을 향하게끔 설계된다. 상품을 위한 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더현대 서울은 상품이 아니라 경험을 판다. 공간의 절반 이상이 경험을 위해 설계되었다. 그 경험 속에는 보통의 백화점에서 결코 보고 느낄 수 없었던 녹음과 작고 소소한 것들이 있었다. 여의도 한복판에서 강원도의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되다니... 내게 더현대 서울은 장소가 되기 충분한 백화점이었다.
내 개인적인 평을 차치하고서라도, 더현대 서울은 이러한 전략을 통해 다른 백화점들이 부진할 때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무려 오픈 3년이 되기도 전에 연매출 1조를 달성한 것이다. 더현대 서울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다양한 브랜드들이 경험 중심의 오프라인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그 공간들에는 소비자의 장소가 되기 위한 여러 구체적 전략들이 사용된다.
공간은 전략이다- 당신의 브랜드를 담아낼 8가지 키워드. 이승윤 지음. 북스톤.
『공간은 전략이다』의 저자인 이승윤 교수는 ‘몰입’, ‘공감’, ‘연결’, ‘진정성’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공간 설계가 어떻게 브랜드와 사람, 지역을 새롭게 잇고 변화시킬 수 있는지 설명한다. 더현대 서울을 비롯한 다양한 사례를 통해 브랜드가 오프라인 공간을 소비자의 장소로 만들어낸 구체적인 전략을 설득력 있게 분석한다.
국내와 해외를 넘나드는 다양한 사례에 대해 곱씹어 읽노라면, 어느새 내가 사랑하는 브랜드, 내가 사랑하는 장소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장소에서 경험이 나에게 다가온 과정과 그 기억에 대해 더듬어보게 된다. 분명 기업과 브랜드의 경제적 전략과 논리를 그리 따뜻하지 않은 어투로 다룬 책인데, 다 읽고 나면 가슴속에 사랑하는 것들이 남는다.
설명문 건축 및 공간디자이너·문화평론가·비평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