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진 문화평론가·출판편집자·비평연대
좀비가 된 모두가 자신의 진정한 목표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을 해낸 두 좀비의 이야기를 나는 알고 있다.
만화는 사망 후 30일 이내에 확률적으로 ‘좀비’가 되는 병이 창궐한 판타지 세계.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올랜드 제국은 먹지도 자지도 않는 저임금 좀비들과 좀비 고용과 인간 대우를 반대하는 인간들이 끊임없이 대립하는 차별 사회다. ‘1인 1 주문’이 원칙인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지 않는 좀비는 머무를 수 없다(일명, ‘노좀비존’인 것이다). 좀비가 된 영업 사원은 부당 해고를 당하고, 억울함을 읍소하고 싶어도 변호사들은 인간이기에 좀비들을 변호해 주지 않는다.
이러한 흑백 사회에서 좀비 가족을 둔 변호사 골드는 이따금 억울한 좀비들의 변호를 맡아 주었다가 ‘좀비 전담 변호사’라는 괴짜 별명이 붙은 자로, 길을 가다 우연히 무덤 속에 생매장되어 죽을 뻔한 좀비를 구해 준 뒤 그녀의 변호를 맡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골드가 아니었더라면 자칫 썩어 죽을 뻔했던 여자의 이름은 릴리. 모종의 이유로 살해당했다가 좀비로 되살아난 여자다. 이 두 사람이 만남으로써, 그 누구도 자세히 생각해 본 적 없던 질문 하나가 던져진다.
좀비가 된 후 자신의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까?
되살아난 좀비는 죽었다고 봐야 하는 것인가, 살아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인가. 죽었다면, 혹은 살아 있다면, 사망 보험금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작품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질문은 그야말로 좀비의 역설, ‘데드미트 패러독스(Deadmeat paradox)’다.
삶과 죽음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훨씬 더 진지하고 묵직하게 다룰 자원이 충분한 아포칼립스물, 그중에서도 좀비물을 가지고 이만큼 조잡한 질문을 파생시킬 수 있다니(!) 올랜드 제국을 양분하는 거대한 두 이데올로기(반좀비파vs친좀비파)가 끊임없이 부딪히는 가운데 피어난 지극히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질문. 이 과감함에서 생겨난 파괴적인 위트가 작품 곳곳에서 반짝인다. 살아생전에는 친좀비파였지만 죽어서는 ‘좀비는 죽은 것’임을 증명해 사망 보험금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인 릴리와 그녀에게 사망 진단을 해 주어 그녀(좀비)를 돕거나 사망 진단을 해 주지 않아서 그녀를 제외한 다른 좀비들의 권리에 도움을 준다는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반좀비파 의사. 두 사람의 캐릭터성 대비는 이러한 패러독스 위트의 정점에서 독자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소견서를 적어주면, / 네 뒤의 좀비는 이득을 보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로 인해 더 많은 인간들이 안전해질 겁니다."
"재판에서 승리한다면 좀비는 곧 '시체'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이고 / 다시는 좀비들이 인간의 자리를 넘보지 않게 만들어줄 겁니다."(71쪽)
<데드미트 패러독스>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거대 담론의 충돌, 그 사이 위트와 패러독스 말고도 하나 더 있다. 어쨌거나 이토록 혼란 가득한 시기를 살아내는 등장 ‘좀비’들 개인의 성장 서사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구구절절한 과정은 직접 만화를 통해 즐기길 바라니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끝내 세상의 틀에 맞춘 거짓된 목표가 아닌 자기 자신이 원했던 진정한 목표를 알게 된다.
출판 편집자가 되었다. 신입 시절 내가 만들고 싶은 '좋은 책'은 까마득한 회사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좋은 책'의 모습과 너무도 달랐는데, 그 간극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언제나 나였다. 선배들이 그렇게 하라고 강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그들은 나와의 대화에서 세대, 성별, 기타 등등의 이유로 취향이 겹치지 않는 간극이 생겼을 때 거리낌없이 실망하거나 "이걸 모른다고? 너 평소에 책 안 읽니? 퇴근하면 대체 뭐 해?" 물으며 흥미 잃은 표정으로 대화를 중단할 수 있는 위치였고 나는 아니었을 뿐이다.
어릴 적의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후배가 되고 싶어 애썼다. 내가 가장 듣기 무서워했던 말은 금요일 오후 5시 45분에 듣는 '이거만 얼른 끝내고 퇴근해 줘'도, 회의 후 듣는 '막내 편집자가 먹고 싶은 메뉴로 회식하지? 골라 봐, 근데 난 고기랑 한식이랑 중식이랑 양식이랑 해산물은 좀 별로'도 아니었다.
"이걸 안 읽어 봤어?"
나는 선배 편집자들에게서 듣는 이 말을 가장 무서워했다. 너무나도 기본적인,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보편적인 기준에 내가 미달인 사람인 것 같아서. 감히 편집자가 될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출발부터 실패한 것 같아서. 퇴근하면 선배들이 하루 종일 제각각 떠들었던 '이 정도는 알아야지!' 리스트를 탐독하느라 바빴다. 개중 몇몇은 내게도 인생 작품이 되었고 몇몇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것은 도움이 되었고 어떤 것은 그냥 돈과 시간만 버렸다. 어쨌거나 그 리스트는 끝도 없었고 아무리 좇아 봤자 내가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 날은 오지 않았다. '이걸 모른다고? 너 책 안 읽니?'의 바다는 넓고 깊었다. 따라가려다가는 내 취향만 잃어갈 뿐.
<데드미트 패러독스>의 좀비들이 가졌던 '틀에 맞춘 목표'가 내게는 '선배들에게 교양을 인정 받는 편집자'였던 것이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원동력으로 삼을 만한 더 건강한 에너지원을 찾아야 한다고 분명히 생각한다. 실버와 릴리처럼, 나도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 그것을 좇을 것이다.
'이걸 모른다고?'에 위축되지 말아야지. 하지만 일본의 3대 출판사 고단샤에서 치바 테츠야상을 수상하고 <데드미트 패러독스>를 연재한 그들을 모른다고? 에이, 얼른 이깟 창은 닫아 버리고 사토와 강착원반의 '죽음 3부작'을 읽어 보길 바란다.
그러기 싫다면 차라리 우리 그냥 다같이 좀비가 되자. 내가 당신에게 '감히 이걸 모른다고?'를 마구 외쳐대는 꼰대로 자라지 않을 수 있도록, 나의 말이 만화 덕후의 강제성 없는 순수한 추천으로만 기능하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적어도 좀비가 되면 심장이 뛰지 않으니,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하는 인생작 같은 것도 안 생기겠지. 그러면 더 이상 누군가에게 그런 것을 강요하며 내 기준에 맞추려 들지도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