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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밸류뉴스=박정호 기자]

이 책은 그 시대와 사회가 안고 있는 우리 삶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제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학자들의 고민과 문제의식, 그리고 그들의 위대한 사상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향력에 비해 우리에게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경제학자들에 대해 다루면서 경제학의 ‘비전’이라는 큰 틀 안에 일관되게 담아내고 있다. 또한 딱딱한 이론들을 알기 쉽게, 그리고 경제학자들의 개인사와 접목하여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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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까지만 해도 동양인이 돈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서양인이 돈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에는 차이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양인이건 서양인이건 돈을 멸시했고, 멀리 할 수록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 대중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 인간이 무리를 지어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사회의 영속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였다. 초기의 인류는 전통에 따라 사회를 조직함으로써 영속성을 확보했다. 필요한 다양한 과업을 관습과 관례에 따라 다음 세대로 계속 물려주는 방법이다. 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이어받는 식의 이러한 양상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지배해왔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에서는 모든 인간은 종교 원칙에 따라 아버지가 하던 직업을 계승해야 했다. 만일 다른 직업으로 바꾸면 무서운 신성모독을 범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일부 직종이 카스트에 따라 대를 이어가고 있다. 사실 공업화되지 않은 많은 국가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을 타고 난다.


- 사회는 권위적 통치라는 채찍을 사용해서 과업이 수행되도록 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어떤 진취적인 사업가가 그것을 건설하겠다고 생각해서 건립된 것이 아니다. 소련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도 전래하는 관습이나 이기심에 우연히 부합됐기 때문에 수행된 것이 아니다. 소련이나 이집트는 모두 명령 사회였다. 그들은 명령에 의해 사회의 영속성을 확보했다.


- 교육은 이런 방식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했다.


- 오랜 시간동안 인간은 이렇게 전통이라 명령이라는 해결책에 따라 자신의 생존 문제를 다루어왔다. 그리고 문제를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는 동안에는 경제학이라는 특수한 분야가 생겨날 수 없었다. 경제는 존재했지만 경제학은 존재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경제 활동이 관습이나 명령에 따리 이뤄지는 한 그런 활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줄 경제학자는 필요하지 않았다. 신학자, 정치 이론가, 철학자, 역사학자는 필요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경제학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 사회의 영속성을 확보하는 놀라운 방법이 탄생했다. 그것은 시장 체제로 불렸고, 그 규칙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바로 개인은 자신의 금전적 이득에 가장 도움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장 체제하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전통이나 권위의 채찍이 아니라 이익의 유혹 때문에 과업을 수행했다. 개인이 개별적으로 일기을 추구하는데도 사회의 영속성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관찰해야 했다. 

경제학은 이런 관찰과 경험칙의 결과 드디어 탄생했다.


- 시장 혁명은 지금까지 일어난 어떤 혁명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총이나 칼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경제학을 경시했다.


-이윤 추구라는 개념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시기에 낯선 개념이었다. 이윤 추구는 겨우 현대인과 함께 시작됐을 뿐이다. 이윤 추구는 유사 이래 대부분의 기간동안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눈에 띈다.


- 중세 시대의 교회는(조선 시대의 교양 서적은) 양반은 누구나 상인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 물론 부라는 것은 언제나 존재했고  물질에 대한 탐욕은 구약성서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 그러나 소수 유력자의 부를 보고 시기심을 느끼는 것과 부를 향한 전반적 투쟁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것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 초기의 자본가들은 사회의 기둥이 아니라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이거나 뿌리를 내리지 못한 떠돌이인 경우가 많았다. 기곳저곳에서 핀칼레의 성 고드릭 가은 사업 정신을 가진 소년이 나타나 부두 건달로 시작해 난파선으로부터 많은 도자기를 모아 상인이 됐다가 돈을 모으고 나서는 은둔자로 고결하게 은퇴하곤 했다.


- 지상에서의 삶이 영생을 위한 준비 기간이라는 생각이 지배하는 한, 기업가 정신은 격려될 수 없었고 자생을 위한 자양분을 얻을 수도 없었다.


- 교환이라는 개념은 인류 역사만큼 오래됐지만 이익의 개념은 다르다.


-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러한 메커니즘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보편적 이익이라는 개념은 신성 모독이 되고도 남았다. 이익을 쫓는 전반적 투쟁이 실제로 공동체를 결속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미친 짓으로 취급될 뿐이었다.


- 토지, 노동, 자본이 존재하지 않았다.


- 중세에는 시장과 노동과 자본이 없었기 때문에 시장이 없었다.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는 지방적 수준의 명령과 관습에 의해 움직였다. 영주들은 명령을 내렸고, 생산은 그에 따라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했다.  명령이 없을 경우 사람들은 고정된 궤도를 따랐다.


- 책을 펴고 보는 시험처럼 장원과 교회 및 도시의 법률과 관습속에 모든 설명이 있는데, 누가 수요 공급이나 비용이나 가치라는 추상 법칙을 찾아 해매겠는가?


- 시장이 사회의 영속성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자리잡기까지 저항은 격렬했다.


- 대체 어떤 힘이기에 안락한 기성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롭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탐탁해하지 않는 이러한 사회를 거뜬히 세울만큼 강력했을까. 단 하나의 거창한 원인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치 나비가 번데기 속에서 자라듯 새로운 생활방식은 낡은 생활방식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릭 생명의 꿈틀거림이 충분히 강해지자 그 것은 낡은 껍질을 깨버렸다.

첫째, 유럽에서 국민적 정치 단위가 대두했다.
둘째, 르네상스 혁명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종교의 정신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 시장이나 금전에 관련된 일은 신사나 학자가 진지하게 고려하기에는 너무나 땀내나고 천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렸다.


- 1979년 율산그룹의 신선호 회장은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그는 탈출 직후 기자회견을 갖고 "납치범들이 청와대 비서실을 사칭해 따라갔다"고 말했다. 이 말실수가 청와대 비서실의 비위를 건드렸고, 결국 율산의 부도를 몰고 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당시 율산의 회생을 위해 진지하게 검토되던 긴급운전자금 지원 방안이 백지화됐다. 1975년 신선호 율산 회장은 당시 27세의 나이로 겅기도 동창생 6명과 함께 자본금 100만원으로 율산실업을 창업했다. 20대 후반의 풋내기 사업가들로 구성된 율산은 패기와 추진력, 기발한 아이디어를 앞세워 급성장한다. 

 
-1983년 7월 31일 아침 국세청이 발칵 뒤집혔다. 주요 일간지 1면에 동시에 실린 명성그룹의 폭로 광고 때문이었다. 당시 재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명성그룹이 국세청의 세무 조사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음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강호제연께 알리는 말씀'으로 시작된 이 광고는 명성그룹 심철호 회장이 직접 쓴 글이었다.

"황당무계한 유언비어가 일부 몰지각한 자들에 의해 날조되고있다. 한 기업의 의욕을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는가. 악성 유언비어는 비극적인 최후만을 기다릴 뿐이다."
광고 문안에 나타난 김 회장의 마음은 폭발직전이었다. 세무조사를 받는 기업이 국세청에 정면도전한,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국세청은 조사를 강화했다. 조사요원을 50명에서 100명으로 늘리고, 이례적으로 언론에 중간 조사 결과까지 발표했다. 그해 8월 17일 대검중앙수사부가 명성그룹 회장 김철호씨를 탈세, 엄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하면서 명성그룹은 간판을 내리게 된다. 김철호 회장은 1966년 호남비료에서 안전과정으로 근무하면서 따로 금강운수라는 회사를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다재다능한 경영능력을 발휘하며 80년대 레저 업계의 기린아로 성정해 순식간에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치 권력의 괘씸죄에 걸리자 한순간 무너졌다.


- 1985년 국제그룹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표면적이 이유는 무리한 기업 확장과 과도한 단기자금 의존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중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미움을 샀고, 결국 정부와의 불화 때문에 강제로 해체 됐다는 의혹이 떠올랐다. 1983년 새마을성금 과정에서 양정모 회장이 기부금을 적게 냈고, 84년 청와대 만찬에 지각을 하는 등 여러 차례 정권에 밉보여 결국 희생양이 됐다는 설이 공공연했다. 93년 헌법재판소는 "5공 정부의 국제그룹 해체는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5공 정부가 부당하게 공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판단했다.


- 전두환 정권은 한국의 대기업을 구조조정했다. 1980년 8월 중공업 통폐합 조치에 이어 1980년대 중후반까지 사업 합리화 조치 등으로 주요 산업을 교통정리했다. 발전설비는 대우그룹으로 일원화하고, 한국중공업을 설립하며, 건설중장비는 삼성, 대우, 현대중공업, 비승용차는 현대자동차와 새한(대우자동차)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리 대상에 오른 78개 기업 가운데 57개 기업이 제3자에게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재계 10위권의 국제, 명성, 삼호 그룹이 간판을 내렸다. 반면 이 시절 정부 시책에 맞춰 대형화, 전문화를 추진한 삼성, 현대, LG, SK, 대우그룹은 기반을 탄탄히 하며 본격적을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 2000년대 초반 한국에는 카드 광풍이 불었다. 한국인들이 경제 금융 관념이 얼마나 희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 정치 권력이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은 8, 3 사채 동결조치다. 1972년 8월 2일 밤 11시 40분, 야간 통행 금지를 20분 앞두고 정부가 발표를 했다.
"기업들이 안고 있는 사채를 일정 기간 갚지 않아도 된다. 금리도 시중 실세 금리의 4분의 1 수준인 월 1.35%만 내도록 한다."
한마디로 기업의 사채권자의 모든 채권를 이 날짜로 무효화하고 새 계약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8, 3 사채 동결 조치로 불리는 이 조치로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채무자에게 빌려준 돈을 일정 기간 받을 수 없고, 당초 약정한 이자도 챙길 수 없었다. 사유재산권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 시장 경제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터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의 감성과 그에 걸맞은 독재 권력이 확보돼 있기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 우리는 1894년의 서울로 돌아간다. 갑오경장. 신분제도 폐지. 그러나 농민은 여전히 농민.

- 1894년 인구의 대부분은 농민. 농민의 특성. 세상의 질서. 농사란 천직. 자본 축적의 개념은 없었다. 토지, 노동, 자본의 개념이 없었다.


- 1900년 기업의 등장. 이 무렵의 상업 종사자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고용인의 존재이다. 1938년 화신백화점의 경우 남자 300명, 여자 200명을 합쳐 모두 500명의 종업원이 있었고, 그 외에 미쓰코시, 조지아 백화점도 수백명의 점원을 두고 있었다. 개벽 제16호. 1921년 10월 18일. '우리의 사회적 성격의 일부를 고찰해서 동포형제의 자유처반을 족함'

"총독 정치가 시작되며 이래 십년간에 학식도 문벌도 사상도 인격도 다 쓸데가 없고, 오직 돈만 있으면 신분 좋은 사람 축에 들어 .... 다시 한번 돈의 위력을 느끼었고, 최근의 만세운동과 같이 문화운동을 시행할 새 이것저것 시설할 것은 부지기수인데, 돈 한가지 없어... 가장 절실하게 돈의 필요를 느끼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일부 식자 계급을 제한 외에는 돈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같이 소리를 아울러 돈! 돈! 돈! 한다. 그렇다 하여 무슨 큰 돈을 생산하는 것도 아니오, 자못 귀하다 하여 그를 부르고자 할 뿐이다. 이것이 소위 배금열(拜金熱)이라는 것이다."


- 1926년 한 신문은 사설에서 "인정도 없고, 의리도 없고, 도덕도 없고, 염치도 없어진" " 황금에 대한 숭배열"을 '참극'이라고 개탄하고 있다. 이처럼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주도적 코드로 자리하게 되자, 상품 거래를 통해 돈을 버는 상인들의 사회적 위상 또한 높아졌다. 신문 등 태생적 조선에 의해 사회적 활동이 제한됐던 전통 시대에 비해 이제 상인이라는 직업은 더이상 사회적 진출과 출세의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게 됐다. 자본력 있는 상인들은 정관계와 경제, 문화계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의 중심은 정치 권력이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관리가 되거나 군인이 되야 마땅했다. 기자가 되는 것도 괜찮았다. 단, 상인이 되는 것은 천대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사농공상이라는 표현이 이를 증명한다.


- 1960년 박정희 정권 출범 당시 . 인구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

- 경제 개발 시작. 한국 사회. 고정된 세상. 자본주의 체제를 갖고 있었으나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정치와 권력. (케이스 나열하기..)


- 1960년부터 1998년 외환위기까지의 약 40년의 한국 사회는 겉보기에는 변함이 없었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대량 해고, 실직이 난무. 한국인은 이때 처럼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적어도 정치와 권력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 그것이 시장 경제라는 것을 파악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 대다수의 사람들은 외환위기가 해소되면 사회는 다시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해고 근로자와 살아 남은 동료가 부동켜 안으면서 "다시 만나자"고 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용수철 처럼 한번 튕겨나간 변화한 사회는 영원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들은 2000년을 맞이했다. 인터넷 붐이 벌어지면서 사람들은 풍요의 착각에 빠졌고, 시장 체체의 본격 작동을 선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인터넷 붐이 꺼지고 경기침체가 찾아오고 다시 해고의 칼바람이 불자 사람들은 이번에는 원인을 닷컴 몰락 때문으로 여겼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경기 침체를 원인으로 돌렸다. 
사람들은 이제서야 무언가 다른 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어렴품하게나마 깨닫기 시작했다. 재테크 서적이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는 이들 서적이 어렴풋하게나마 세상의 질서가 돈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가 있다. 교육제도가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논리에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사회를 움직이는 진짜 힘이 시장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없었다. 왜? 어느 교과서에도 그런 내용이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pjh@thevalu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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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07-26 1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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