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과 상법 개정 기조가 맞물리면서 대기업 지주사들의 자본 구조 재편이 본격화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자사주 소각 카드를 꺼내든 곳은 SK그룹 지주사인 SK다.
SK는 보유 자사주 보통주 24.8% 가운데 임직원 보상 목적 물량 4.54%를 제외한 20.3%를 내년 1월 4일 전량 소각하기로 결정했다. 발표 당시 시가 기준 약 4조8000억원, 장부가 기준 약 1조6000억원 규모다. 국내 자본시장 역사상 단일 지주사 기준 최대 수준의 자사주 소각이다.
시장에서는 이번 결정을 단순 주가 부양이나 일회성 주주환원을 넘어, △세금 대응과 자회사 지분 유동화 △AI·반도체 중심의 자본 재배치가 결합된 복합 자본 전략으로 해석하고 있다.
◆ 이연법인세 5000억원 현실화…SK바이오팜 PRS로 재원 확보
SK가 지주사 역대 최대 '4.8조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을 진행하며 복합 자본 전략을 펼치고 있다. [자료=더밸류뉴스 | AI 생성]이번 자사주 소각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약 5000억원 규모의 이연법인세 부담이다. 기존에는 회계상 뒤로 미뤄두었던 세금(이연법인세)이 대규모 자사주 소각과 함께 실제 비용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세금 납부를 위한 자회사 지분 매각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금융투자업계는 오히려 SK가 자산 유동화를 통해 대규모 차익과 현금을 동시에 확보했다고 평가한다.
SK는 최근 자회사인 SK바이오팜 지분 13.94%를 PRS(주가수익스왑) 방식으로 유동화해 1조2500억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이번 거래를 통해 약 1조1700억원 규모의 매각 차익도 실현한 것으로 알려졌다.
PRS는 주식을 매각하더라도 향후 주가 상승에 따른 차익을 원매도자가 일부 가져갈 수 있는 방식이다. 단순 블록딜(시간외 대량매매)과 달리 자회사 미래 가치에 대한 경제적 실질을 일정 부분 유지하는 방식이다. 증권가에서는 SK가 단기 유동성 확보와 동시에 바이오 사업 성장 과실까지 유지하려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승웅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이번 자사주 소각으로 이연됐던 세금 약 5000억원이 현실화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SK바이오팜 지분 유동화로 유입되는 현금 1조2500억원을 감안하면 세금 납부와 SKC 유상증자 참여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재원을 확보한 상태”라고 분석했다.
실제 확보한 자금 가운데 약 5397억원은 SKC 유상증자에 투입될 예정이다. 해당 자금은 AI 반도체 핵심 소재로 부상한 글라스기판 사업 자회사 앱솔릭스 증설에 활용된다. 바이오 자산 일부를 유동화해 AI·반도체로 자본을 재배치하는 구조다.
◆ 발행주식 20% 소멸…ROE 재편에 SK하이닉스 낙수 효과까지
SK최근 분기별 매출액 및 영업이익률 추이. [자료=더밸류뉴스]회계 구조상 자사주 소각은 발행주식 수 자체를 줄여 EPS(주당순이익)와 ROE(자기자본이익률)를 끌어올리는 효과를 만든다. SK는 전체 발행주식의 5분의 1 수준이 한 번에 소멸되는 만큼 자본 효율성 지표가 급격히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다.
증권가에서는 자기자본 감소와 계열사 실적 개선이 동시에 반영되면서, 지난해 6.4% 수준이었던 SK의 ROE가 자사주 소각 효과가 반영되는 2026년에는 40%대까지 급등할 것으로 관측했다. BNK투자증권 리서치센터는 올해 SK의 지배주주 기준 ROE를 47.1%로 추정했다.
특히 시장은 SK 순자산가치(NAV)의 절반 이상(약 54%)을 차지하는 중간지주사 SK스퀘어 가치 상승에 주목하고 있다. SK스퀘어는 SK하이닉스 지분 20%를 보유하고 있다. HBM(고대역폭메모리) 중심의 AI 반도체 호황이 이어지면서 지주사 가치에도 직접적인 낙수효과가 반영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NAV 측면에서는 기업가치 중 스퀘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54%로 확대되었고, 현금흐름 측면에서는 향후 SK스퀘어 배당 지급 시작으로 인한 배당 수익원 확대가 기대된다는 시각으로 포트폴리오와 반도체 업황의 연동이 강화되고 있고 평가하고 있다.
SK는 보통주 기준 주당배당금(DPS) 8000원을 지급하며 고배당기업 과세 특례 요건도 충족했다. 여기에 내년 1월 20.3% 규모의 자사주가 영구 소멸하면 세후 배당 수익률에 민감한 장기 투자 자금 유입 가능성도 커질 전망이다.
◆ 'SK에코플랜트 IPO 지연 전략인가'…비상장 가치, '지주사'에 집중
(주)SK의 주요 계열사 지분 현황 [자료=더밸류뉴스 | AI 생성]
또 다른 주목 포인트는 SK에코플랜트의 상장(IPO) 철회 유예에 따른 반사이익이다. 시장에서는 SK에코플랜트 IPO 일정 지연이 결과적으로 SK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SK는 지난해 반도체 가스·소재·부품 관련 핵심 자회사들을 SK에코플랜트 아래로 재편했다. 이후 메모리 업황 개선과 반도체 소재 사업 성장세가 겹치면서 SK에코플랜트의 수익성이 급격히 개선됐다.
올해 1분기 SK에코플랜트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99.3% 증가한 4조8997억원, 영업이익은 1269.1% 급증한 9314억원을 기록했다. 고마진 반도체 소재 사업부(에센코어·TES 등)가 실적을 견인하면서 영업이익률은 19%까지 상승했다.
이는 사모펀드 등에 팔려있던 지분을 되사오면서 SK에코플랜트의 실적이 온전히 지주사 가치에 반영되는 구조가 형성된 것으로 시장은 분석하고 있다.
비상장 자회사가 상장될 때 발생하는 중복상장 할인 우려를 피하는 동시에, 과거 SK E&S가 담당했던 고배당 현금 창구 역할을 SK에코플랜트가 대체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SK그룹은 지난 2024년 말 자사주 직속의 우량 자회사였던 SK E&S를 상장 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과 합병한 바 있다. 현금 배당의 핵심 캐시카우가 이탈하면서 주주환원 재원 약화 우려가 있었으나, 반도체 소부장 자회사 편입으로 체질을 전환한 SK에코플랜트가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핵심 자산 유동화를 통한 현금 확보, AI·반도체 중심의 자본 재배치, 자사주 소각을 통한 ROE 개선, 비상장 자회사 가치 집중 효과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시장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