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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기 칼럼] '전기는 넘치는데 길 없다'… 대한민국 덮친 송전망 역설

- AI·반도체 폭증에 발 묶인 전력망… 인프라 추월한 산업

- 주민 반발과 지역 불균형에 막힌 송전망, 국가 첨단산업 위협

- “발전보다 송전망이 핵심”… 전력 이동 능력이 곧 산업 경쟁력

  • 기사등록 2026-06-01 08: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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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밸류뉴스=강성기 선임기자]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 첨단 반도체 공장, 전기차 등 미래 산업은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는 대표적인 ‘전기 먹는 하마’로 꼽힌다. 특히 AI 산업의 핵심 인프라인 데이터센터는 24시간 내내 대규모 서버를 가동하고 발생하는 열을 식혀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전력을 소비한다. 


[강성기 칼럼] \ 전기는 넘치는데 길 없다\ … 대한민국 덮친 송전망 역설첨단 반도체 공장이나 데이터센터를 짓는 데는 2~3년이면 충분하지만, 정작 여기에 전력을 공급할 발전 및 송·변전 시설 구축은 행정 절차와 지역 주민과의 갈등으로 인해 5~7년 넘게 소요되는 등 전력 인프라 공급에 과부하가 걸려 있다. [이미지=더밸류뉴스 | AI 생성] 

실제로 AI 검색 한 번에 필요한 전력은 일반 검색 서비스보다 훨씬 많은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첨단 반도체 생산시설 확대, 전기차 보급 증가, 공장 자동화까지 맞물리면서 글로벌 전력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첨단 산업의 성장 속도를 전력 인프라 구축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데이터센터나 첨단 반도체 공장은 통상 2~3년이면 완공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발전소와 송전망, 변전소 등 전력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에는 각종 인허가 절차와 주민 수용성 문제 등으로 최소 5~7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기술 혁신의 속도와 전력 인프라 확충 속도 사이에 발생하는 이른바 ‘시간적 시차(Time Lag)’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첨단 산업이 빠르게 질주할수록 오히려 전력 부족이 산업의 발목을 잡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래 산업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 AI와 반도체라면, 이를 떠받치는 가장 근본적인 기반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다. ‘전력 패러독스(Power Paradox)’가 국가 경제의 가장 현실적인 리스크로 부상하고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전기’는 넘치는데 ‘길’이 없다… 대한민국 첨단산업 멈춰 세우는 ‘송전망 병목’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의 패러다임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과거의 전력 대책이 "발전소를 어디에, 얼마나 더 지을 것인가"라는 일차원적인 공급의 문제였다면, 지금 마주한 본질적 위기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난제다. 발전소는 지어놨는데 정작 그 전기를 보낼 ‘길’이 막혀버린 탓이다. "발전설비보다 송전망 확보가 더 어려운 시대"라는 전력당국의 자조 섞인 진단은,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전력 계통의 동맥경화 현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대변한다.


가장 상징적인 비극의 현장이 바로 강원·경북의 전력을 수도권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추진된 '동해안-수도권 초고압직류송전(HVDC)' 사업이다. 기저부하인 동해안의 원전·화력 전력을 수도권에 공급하고, 급증하는 지방의 재생에너지를 연계하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의 가공할 만한 전력 대식(大食) 수요에 대응하겠다는 원대한 목적을 가진 국책사업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한 공정 지연뿐이다. 일부 지역 주민들의 반대, 송전탑 경관 훼손 논란, 전자파 우려와 토지 보상 갈등, 그리고 지자체와의 협의 불발이 거대한 벽이 되어 발목을 잡았다. 수조 원을 들여 발전소를 다 지어놓고도 전기를 보내지 못해 발전기 출력을 강제로 제한해야 하는 황당한 대가가 고스란히 국가적 손실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송전망 공포’의 뿌리에는 한국 전력 구조의 고질적인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 경남 밀양 송전탑 사태는 우리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전력은 수도권이 소비하면서, 왜 위험과 환경 부담은 지방이 감수해야 하느냐"는 지방의 목소리는 단순한 지역이기주의를 넘어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거센 저항이다. 


이로 인해 전국 지자체들은 송전망 유치에 극도로 민감해졌고, 초기 단계부터 사업이 표류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지방·해안가에 지어지는 서남해 해상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역시 거대한 송전망 없이는 '계통 접속 대기'라는 늪에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강성기 칼럼] \ 전기는 넘치는데 길 없다\ … 대한민국 덮친 송전망 역설주요 송전망 갈등 사례 표. [자료=더밸류뉴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도시 수준 전력 소모… 송전망 구축, 반도체 투자 속도 따라가지 못해


문제는 갈등 해결 속도보다 전력 수요의 폭증 속도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다는 점이다. 생성형 AI 확산으로 가동되는 GPU 서버와 클라우드 센터, 즉 'AI 데이터센터'가 전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비즈니스 생태계상 이들 데이터센터와 세계 최대 규모로 조성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모두 수도권 입지를 원한다. 무정전 전력 공급이 필수적인 반도체 팹(Fab) 하나는 웬만한 도시 하나 수준의 전력을 소모한다. 


산업의 시계는 초단위로 굴러가는데, 이를 뒷받침할 장거리 송전선과 변전소 구축의 시계는 주민 민원과 환경영향평가에 막혀 멈춰 서 있다. “송전망 구축 속도가 반도체 투자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국가 경쟁력이 추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기 직전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거대한 인프라를 책임져야 할 한국전력공사는 수십 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적자와 부채 더미에 올라앉아 투자 동력마저 잃어가고 있다. 수요는 폭증하고, 주민 수용성은 악화되며, 건설 기간은 장기화되는데, 돈줄마저 막힌 ‘5중고’의 상황이다.


우리는 공급 중심의 전력 정책이 가졌던 치명적인 맹점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발전소 건설이 ‘기술과 자본’의 영역이라면, 송전망 건설은 대화와 타협, 즉 ‘사회적 합의’의 영역이다. 후자를 소홀히 한 대가는 전국적인 송전탑 갈등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전기 공급은 당연한 권리'라는 수도권의 안일한 인식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지방의 희생을 바탕으로 켜지는 불빛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그에 따르는 비용과 사회적 부채를 기꺼이 분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강성기 칼럼] \ 전기는 넘치는데 길 없다\ … 대한민국 덮친 송전망 역설정부와 국회는 송전망 구축을 국가 최우선 과제로 삼고 즉각 행동에 나서야 한다. 파격적인 지역 보상책 마련과 지자체 지원을 위한 법제화를 서두르는 한편, 갈등과 불통을 해소할 전방위적 사회적 합의 모델을 이끌어내는 데 총력을 다해야 할 때다. [이미지=더밸류뉴스 | AI 생성] 

◆첨단 AI·반도체 시대의 핵심 리스크, 송전 능력 부재… 최고위 정치 영역


이제 냉정하게 인정해야 할 때다. 첨단 AI·반도체 시대의 핵심 리스크는 '발전소 부족'이 아니라, '생산된 전기를 보낼 능력의 부재'에 있다. 전력망을 선제적으로 확보한 국가만이 미래 첨단 산업을 지배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송전망 문제는 더 이상 한전이라는 공기업의 단순한 토목 공사 이슈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를 쥔 국가 첨단 산업정책의 생사여탈권이자, 국가균형발전과 지역 갈등을 아우르는 최고위 정치의 영역이다.


정부와 국회는 지금이라도 송전망 건설을 국가적 최우선 과제로 격상해야 한다. 파격적인 지역 보상 현실화와 지자체 인센티브 제공을 위한 법적 기반을 조속히 정비하는 것은 물론, 막힌 불통의 고리를 끊어낼 전방위적 사회적 합의 모델을 도출해야 한다. 아울러 송전선로 지하화(지중화) 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도 더는 주저해서는 안된다.


동해안의 멈춰 선 송전탑이 던지는 경고를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조만간 '발전소는 많지만 정작 전기는 쓸 수 없는' 기이한 전력 빈국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전기의 길이 막히는 순간, 우리가 그토록 부르짖던 반도체 신화도, AI 혁신도 결국 한낱 신기루처럼 사라질 뿐이다.


skk815@thevalu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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