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일본 수도 도쿄의 한복판 동경화랑에서 윤형근(1928~2007) 화백의 개인전이 열렸다.
일본 현지인들의 혐한(嫌韓) 감정이 만만치 않은 시기였지만 이 전시회는 일본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림의 깊이와 수준이 워낙 확고했기 때문이다.
윤형근의 대작 앞에 선 동경화랑 사장 야마모토 다카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작품은 조선 백자를 연상시킨다.”
윤형근의 그림은 투명한 흰색과 깊이 있는 청색의 조화로 ‘맑음과 절제의 미’가 특징이다. 면포나 마포위에 2~3개의 청다색 혹은 검은색 기둥을 세운 그림이 적지 않다.
1978 윤형근 도록. [자료=박용옥 문화예술 연구소]
윤형근은 '한국 미술계의 거목' 김환기(1913~1974) 사위였다. 윤형근은 청주상고를 졸업하고 미원금융조합 서기로 잠시 근무하다 서울대 미술부에 진했지만 미군정이 주도한 '국대안' 반대 시위를 하다 제적됐다. 국대안이란 미 군정이 일제 시대 여러 단과대를 통합해 단일 대학(서울대)을 설립하겠다는 방침을 말한다. 윤형근은 훗날 장인이 되는 김환기 당시 홍익대 교수의 도움을 받아 홍익대 미술학부에 편입해 졸업했다.
그는 장인 어른 이름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그는 평소 말이 없어 '침묵의 화가'로 불렸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으나 그는 꿋꿋이 붓을 들고 자신만의 색채와 언어로 그림을 완성했다. 현재 미술계는 윤형근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세계적 화가로 평가하고 있다.
윤형근은 생전에 친구들에게 그림 한 점씩을 선물했다. 그런데 상당수 친구들이 “화풍이 심심하고 밋밋하다”며 그림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윤형근의 그림 한 점의 값어치는 수천만원을 훌쩍 넘는다. 세상을 앞서가는 예술가의 진가를 너무 늦게 발견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1978년 동경화랑 개인전에 사용된 도록 한 권을 기자는 소장하고 있다. 현재 가자가 소장한 1만여 권의 국내외 미술 도록 가운데 '애장품 1호'이다. 백자의 고요함을 닮은 이 한 권에 작가의 무거운 침묵과 시대를 꿰뚫는 울림이 담겨 있다.
윤형근의 그림은 오늘도 정적 속에서 스스로를 말한다.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진실은 단순하다"는 울림을 전해주고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 졸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