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과 주주환원 확대 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내 주요 기업들의 자본 재편 전략이 확산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회장 정의선)은 단순 배당 확대 대신 자사주 매입·소각과 미래 성장 투자를 함께 추진하는 방식의 주주가치 제고 전략을 구체화했다.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는 지난달 29일 공시한 ‘기업가치 제고 계획 이행현황’을 통해 현재 진행 중인 약 4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물량을 임직원 보상 목적 활용 없이 올해 내 전량 소각하겠다고 밝혔다. 총주주환원율(TSR, 일정 기간 보유한 주식에서 얻은 시세차익과 배당 및 자사주 관련 효과) 35% 이상이라는 기존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의미다.
시장에서는 이번 결정을 단순한 주가 부양책이 아닌 미래 투자 확대 국면에서도 주주환원 기조를 유지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 녹록지 않았던 관세 환경…실적으로 증명한 현금 창출력
현대자동차그룹이 'TSR과 미래 성장 투자'를 주로 하는 복합 자본 재배치 전략을 시행하고 있다. [이미지=더밸류뉴스 | AI 생성]현대차가 공격적인 주주환원 정책을 지속할 수 있는 배경에는 본업에서 창출되는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자리한다. 현대차는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 186조2544억원, 영업이익 11조4680억원, 순이익 9조4460억원을 기록했다. 북미 시장 판매 확대와 고수익 차종 중심의 제품 믹스 개선이 수익성을 뒷받침하며 최대 수준의 실적 흐름을 이어갔다.
다만, 지난 1분기에는 연결 기준 영업이익이 2조514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0.8% 감소했다. 표면적으로는 수익성이 악화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현금흐름은 다른 모습을 나타냈다. 특히 영업이익에 판매보증충당부채 재평가와 판매보증비 증가 등 비현금성 비용이 상당 부분 반영됐다. 환율 변동에 따른 회계상 평가 비용이 장부에 반영되며 이익이 감소했다.
그러나 실제 기업의 현금 창출력을 보여주는 영업활동현금흐름은 3조312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65.4% 증가했다. 장부상 이익과 실제 현금 창출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미국 시장에서 하이브리드차 판매가 빠르게 늘어나며 수익성을 방어했다. 전기차 수요 둔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현대차는 하이브리드 판매 비중을 높이며 친환경차 전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익성 공백을 최소화했다.
관세 변수 역시 현대차가 직면한 대표적인 외부 리스크였다. 시장에서는 미국 관세 정책 변화에 따라 연간 수조원 규모의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지만, 현대차는 생산 효율화와 원가 절감 등을 통해 충격을 상당 부분 흡수했다.
이 같은 현금 창출력을 바탕으로 올해 투자 규모도 확대하고 있다. 회사는 올해 미래 투자(CAPEX, 자본적 지출)를 전년 대비 23.2% 증가한 17조8000억원 수준으로 계획하고 있다. 전동화와 소프트웨어, 미래 모빌리티 분야에 대한 투자를 지속하면서도 주주환원을 병행하는 구조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 '고배당보다 TSR'…'우선주 매입' 자본 효율화 전략
현대차 최근 분기별 매출액 및 영업이익률 추이. [자료=더밸류뉴스]주목할만한 또 다른 지점은 현대차가 ‘고배당기업’ 요건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대차는 현금배당 확대보다 자사주 매입·소각을 이용한 TSR 중심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현금 유출을 확대하기보다 발행주식 수를 줄여 주당 가치를 높이는 방식이다.
이는 자동차 산업이 대규모 투자 사이클에 진입한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현대차는 향후 전동화 전환과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로보틱스, 글로벌 생산기지 투자 등에 상당한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배당 확대는 일단 높아진 수준을 다시 낮추기 어렵다는 특성이 있다. 반면 자사주 매입과 소각은 투자 환경과 실적 상황에 따라 규모를 조정할 수 있어 재무적 유연성이 높다.
이번 자사주 매입에서도 이러한 전략이 확인된다. 현대차가 발표한 총 4007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내역을 보면 주식 수 기준 매입 비율은 보통주 0.16%, 우선주 0.20%로 우선주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보통주는 주주총회에 참석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준 주식인 반면, 우선주는 의결권이 없는 대신 보통주보다 높은 배당률이나 우선적 배당 권리를 보장받는 주식이다.
이는 국내 증시의 대표적인 할인 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 우선주 디스카운트를 완화하기 위한 조치다. 의결권은 없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배당 권리를 가진 우선주를 집중 매입·소각함으로써 주당 가치 상승 효과를 높이겠다는 의도다. 또한 우선주 수가 감소하면 향후 회사가 지급해야 할 배당 부담도 줄어든다. 주주환원 효과와 자본 효율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구조다.
현대차의 주주환원 지속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표도 있다. 올해 1분기 별도 기준 배당금수익은 1조1134억원에 달했다. 글로벌 생산·판매 법인과 금융 계열사로부터 안정적인 배당 재원이 유입되면서 대규모 투자와 주주환원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재무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박광래 신한투자증권 연구위원은 "향후 자율주행, 로보틱스 관련 타임라인에 맞춰 주가와 밸류에이션의 계단식 상승이 나타날 전망"이라며 "관세 불확실성으로 인해 지연됐던 자사주 매입 역시 향후 주가 상승의 확실한 플러스 알파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 성장 자산 확장 본격화…로보틱스·SDV 가치 반영 시작
현대자동차가 기존 완성차 중심에서 미래 모빌리티 포트폴리오 전환을 시행하고 있다. [이미지=더밸류뉴스 | AI 생성]증권업계에서는 이번 자본 정책이 단순 환원 확대가 아니라 사업 포트폴리오 재평가의 출발점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기존 완성차 중심 평가에서 벗어나 소프트웨어 기반 모빌리티(SDV), AI, 로보틱스 사업이 점차 가치 산정 대상에 포함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통한 로봇 사업과 차량 소프트웨어 플랫폼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올해 출시된 차세대 인포테인먼트 플랫폼과 하반기 예정된 실증 일정은 차량 중심 사업에서 고마진 서비스 사업으로 확장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현대차는 올해 자체 차량 소프트웨어 플랫폼인 ‘플레오스(Pleos)’ 생태계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달에는 차세대 인포테인먼트 플랫폼인 ‘플레오스 커넥트(Pleos Connect)’를 적용한 신차를 선보이며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전략을 본격화했다. 로보틱스 분야에서도 사업 구체화가 진행되고 있다. 현대차는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통해 휴머노이드 로봇 상용화 가능성을 점검하고 있으며, 미국 조지아 메타플랜트와 연계한 로봇 활용 확대도 추진하고 있다.
올여름에는 미국 조지아주에서 RMAC(Robot Metaplant Application Center) 가동이 예정돼 있다. RMAC는 실제 자동차 생산 라인과 동일한 환경을 구축해, 피지컬 AI를 실전 배치하기 전 훈련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Atlas)'의 생산 현장 적용성과 경제성을 검증하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하반기에는 SDV 데모카 공개와 로봇 실증 작업도 이어질 전망이다.
사업 변화는 증권가의 평가에도 반영되고 있다. LS증권은 현대차의 하이브리드 판매 확대와 현금 창출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KB증권은 보스턴다이내믹스의 기술 진전을 근거로 현대차를 로보틱스 관점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유지웅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2일 현대차의 적정주가를 100만 원으로 상향 조정하며 "오는 6~10월 중에는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비상장 밸류 급증과 이에 연동한 현대차의 멀티플 확장이 주가 리레이팅을 견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차의 이번 4000억원 규모 자사주 소각은 단순한 주가 부양책이라기보다 투자 확대 국면에서도 주주환원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관세와 전동화 전환이라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안정적인 현금 창출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주주환원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요소다. 동시에 자본 효율화, 우선주 할인율 축소, SDV와 로보틱스 중심의 미래 사업 확대가 함께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