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중국 BOE가 쓰촨성 청두에 630억위안(약 11조원) 규모의 8.6세대 OLED 생산라인 투자를 발표했다. 올해 2월에는 비전옥스도 안후이성 허페이시에 550억위안(약 11조원)을 쏟아붓겠다고 공식화했다. 이는 삼성디스플레이가 지난 2023년 아산에 투자한 4조1000억원의 약 3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벌어지는 이 물량 공세는 2000년대 중국이 LCD 시장을 장악하던 방식과 똑같다. LCD를 잃은 한국이 이번엔 OLED마저 중국에 내줄 것인가. 표면의 숫자만 보면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삼성디스플레이의 2025년 1분기 영업이익률은 8.5%로, 5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보였다. LG디스플레이도 같은 기간 영업이익률 0.6%로 4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반면 중국 BOE는 LCD를 포함한 전체 사업에서 약 10% 수준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업계는 OLED 수익성 개선이 시급하다고 보고 있다. 비전옥스는 더 심각하다. 수년째 영업손실을 기록 중이며, 정부·지자체 지원 의존도가 높다.
중국 BOE와 비전옥스가 저가 중국 내수 시장에서 점유율을 키우는 동안, 삼성은 애플 맥북 프로 탠덤 OLED로 프리미엄 시장 가격 결정권을 쥐었다. LG디스플레이도 WOLED 사업에서 2000억~30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릴 전망이다. 중국이 물량을 가져가는 동안, 한국은 수익을 챙겼다. 디스플레이 산업의 승부 기준이 바뀌고 있다. ‘얼마나 많이 만드느냐’에서 ‘누가 가격을 결정하느냐’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이 변화한 승부 기준에서 얼마나 오래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 경쟁 기준의 전환...물량에서 수익성으로 승부처 바꿨다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이 LCD에서 패배한 것은 사실이다. 지난 2012년 세계 시장 점유율 50.7%에서 2022년 13.5%로 추락했다. 같은 기간 중국은 30%에서 55.5%로 껑충 뛰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2022년 LCD 사업을 완전히 정리했고, LG디스플레이도 지난해 중국 광저우 공장을 매각하며 철수했다. 약 30년간 이어온 LCD 시대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패배를 단순히 '물량 경쟁 실패'로 읽으면 안 된다. 한국이 LCD에서 손을 뗀 이유는 버틸 수 없어서가 아니라, 버틸 필요가 없어서였다.
8.6세대 OLED 투자 규모 및 생산 능력 비교 [자료: 삼성디스플레이•BOE•비전옥스 투자 공시, 전자부품연구원]삼성디스플레이는 2022년 LCD를 정리하며 OLED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100% 전환했다. LG디스플레이는 점진적 전환을 택해 2021년 OLED 비중 38%에서 지난해 55%로 끌어올렸다. 두 회사 모두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물량 경쟁은 중국에 맡기고, 한국은 기준 설정자가 되겠다는 것. 그 기준이란 무엇인가. 첫째, 공정 표준을 누가 만드는가. 둘째, 프리미엄 세그먼트의 가격을 누가 결정하는가. 셋째, 애플·완성차·XR 기업의 로드맵에 누가 먼저 들어가는가. 이 세 가지가 지금 디스플레이 산업의 진짜 경쟁 축이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글로벌 OLED 점유율은 67.2%다. 2023년 73.6%에서 6.4%포인트 하락했다. 중국은 같은 기간 25.7%에서 33.3%로 상승하며 격차를 빠르게 좁혔다. 점유율만 보면 한국이 밀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익성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중소형 OLED 점유율 50%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8.5% 영업이익률을 기록 중이다. 중국 BOE(13.2%)와 비전옥스(7.3%)는 점유율을 늘렸지만, 저가 중국 내수 시장 중심이라 수익성은 이에 못미친다. 같은 OLED 시장에 있지만, 서로 다른 게임을 하고 있다.
◆ 애플 맥북·아이패드 탠덤 OLED...韓만 공급할 수 있는 기술 부각
디스플레이 산업의 본질이 바뀌고 있다. OLED는 '패널'이 아닌 경험을 설계하는 '플랫폼'으로 변모했다. 삼성디스플레이가 지난 1월 CES 2025에서 공개한 노트북용 롤러블 OLED가 그 증거다. 레노버의 '씽크북 플러스 G6 롤러블'에 탑재되는 이 제품은 단순히 화면을 키우고 줄이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공간을 재정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꾼다. 무편광 저전력 기술과 에코 스퀘어 OLED를 결합해 패널 두께를 줄이고 소비전력을 30% 개선했다. 기술 스펙이 아니라 경험 구조를 판다.
한국 vs 중국 OLED 시장 점유율 추이 [자료: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 옴디아(Omdia)] 애플 아이패드 프로에 적용된 탠덤 OLED도 마찬가지다. 발광층을 2개 층으로 쌓아 밝기를 2배 높이고 수명을 4배 늘린 이 기술은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만 양산할 수 있다. 애플은 내년 맥북 프로에도 탠덤 OLED를 탑재하겠다고 밝혔다. 이건 단순한 부품 납품이 아니다. 애플의 제품 로드맵에 한국 기업이 먼저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프리미엄 시장의 가격 결정권을 한국이 쥐고 있다는 의미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11월 탠덤 OLED 패널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부터 'IR52 장영실상'을 받은 바 있다.
차량용 디스플레이 시장도 한국이 앞서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좌우 시야각에 따라 운전자와 조수석 탑승자에게 각각 다른 화면을 제공하는 '듀얼뷰 OLED'를 선보였다. 운전자는 내비게이션을 보고 옆 사람은 영화를 보는 경험. 18인치 슬라이더블 OLED를 적용한 자율주행 콘셉트카는 차량 내부를 '이동하는 공간'으로 재정의한다. 삼성디스플레이도 차량용 OLED에서 옴디아 기준 2023~2024년 연속 출하량·매출 1위를 기록 중이다. 차량용 디스플레이는 단순히 패널을 공급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 제조사의 미래 모빌리티 전략에 한국 기업이 설계 단계부터 참여한다는 뜻이다.
◆ 공급과잉 우려 속 韓의 선택...고난도·고수익 집중
중국의 8.6세대 OLED 투자는 위협인가, 기회인가. 답은 둘 다다. BOE와 비전옥스가 각각 11조원씩 투자해 월 3만2000장 규모 생산라인을 구축하는 건 삼성디스플레이(월 1만5000장)의 2배가 넘는다. 오는 2029년 전후로 공급과잉 위험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옴디아의 분석이다. 모니터용 OLED 패널은 올해 전년대비 60.9% 성장, 노트북용은 45.9% 성장이 예상되지만, 투자 계획을 고려하면 2029년엔 생산능력이 수요를 초과한다. LCD의 악몽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애플 맥북 프로를 타깃으로 투 스택 탠덤 구조와 유리기판·박막봉지 결합 하이브리드 OLED 공법을 적용한다. 이청 삼성디스플레이 대표는 지난 11월 사내 소통행사에서 "IT OLED는 시장 침투가 본격화했다"며 "8.6세대 IT OLED 생산라인의 수익성을 경쟁사가 추격할 수 없는 수준까지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첫 번째 증착기로 애플용, 두 번째로 애플 외 세트 업체용을 만들어 고객 다변화도 추진 중이다. 반면 LG디스플레이는 신중하다. 정철동 사장은 지난해 9월 "8.6세대 OLED 사업이 정말 필요한 것이냐 따져보고 있다"며 기존 인프라 활용 방침을 밝혔다. 옴디아는 LG디스플레이의 8.6세대 투자 가능성을 30%로 낮게 진단했다.
최근 1년 삼성디스플레이 vs LG디스플레이 영업이익률 추이 [자료: 삼성디스플레이•LG디스플레이 IR 자료]
두 회사의 전략이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물량 경쟁은 중국에 맡기고, 한국은 고난도·고수익·저볼륨 구조 설계자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것. 중국이 국가 전략형 물량 플레이어라면, 한국은 프리미엄 세그먼트의 경험 설계자다. 이 차이가 명확해지는 순간, 점유율 하락은 더 이상 패배 지표가 아니다. 수익성과 정의 권력이 진짜 지표다.
◆ 삼성 이매진 인수·LG 공간형 디스플레이...OLED 넘어 차세대 기술 선점 경쟁 본격화
지금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에 필요한 건 물량 투자가 아니라 '다음 정의'다. OLED 이후의 디스플레이는 무엇인가. 마이크로LED인가, 투명 디스플레이인가, 공간형 홀로그램인가. 아니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무언가인가. 그 정의를 쥔 자가 승자다. 정부도 움직이고 있다. 2023년 5월 디스플레이 핵심 기술을 '국가첨단전략기술'로 지정하며 민간 투자 65조원과 정부 R&D 1조원 투입을 약속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내년 디스플레이 R&D 예산을 776억원으로 전년대비 104% 증액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반도체, 배터리에 비해 디스플레이 육성정책이 실종됐다"는 불만도 나온다. 디스플레이는 이제 단순 부품이 아니다. AI 디바이스의 인터페이스이고, XR 기기의 관문이며, 자율주행차의 공간 설계 도구다. 삼성디스플레이가 2023년 미국 마이크로 OLED 전문 기업 이매진을 2900억원에 인수한 것도, LG디스플레이가 차량용·공간형 디스플레이에 집중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OLED는 끝이 아니라 다음으로 가는 발판이다.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은 지금 두 가지 길 앞에 서 있다. 첫째, 중국의 물량 공세에 맞서 점유율 방어에 나설 것인가. 둘째, 점유율은 중국에 맡기고 수익성과 정의 권력을 가져갈 것인가.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는 이미 두 번째 길을 택했다. 현재 디스플레이 산업의 승부 기준은 바뀌었다. 물량이 아니라 정의, 점유율이 아니라 수익성, 패널이 아니라 경험. 한국은 여전히 그 기준을 쥐고 있다. 그 기준을 얼마나 오래 쥐고 있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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