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며 글로벌 공급망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 물류 마비가 단순한 변수를 넘어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뉴 노멀’이 된 현시점, 우리 수출 역군들이 공급망 사수를 위해 머리를 맞댔다.
부산항만공사(BPA, 사장 송상근)는 지난 5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해외 항만·물류사업 진출 지원 세미나'를 열며, 공공과 민간이 협력해 글로벌 물류 영토를 확장하는 ‘K-원 팀(One Team)’ 결성을 선언했다.
중동 사태와 미중 갈등 속 우리 기업의 수출길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 열띤 논의가 이어진 현장을 본 기자가 직접 다녀왔다.
◆ 격량 속 ‘K-원 팀’ 시급…동반 성장 촉구
송상근 부산항만공사 사장이 ‘해외 항만·물류사업 진출 지원 세미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인사말에 나선 송상근 부산항만공사 사장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송 사장은 "지금 우리는 전례 없는 물류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며 글로벌 해운동맹 재편, 탈탄소 규제 강화,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 등을 주요 변수로 꼽았다. 특히 최근 고조되는 미국과 이란 간의 중동 사태와 심화되는 미·중 무역전쟁 등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우리 기업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송 사장은 위기 대응의 실마리를 현장에서 찾았다. 그는 지난해 5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열린 간담회 당시 "수출로 고충을 겪는 중소·중견기업들에 공기업이 실질적인 버팀목이 되어달라"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전했다.
이에 "부산항만공사가 앞으로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작년 가지게 됐다"며 “그 반성이 이번 세미나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BPA를 중심으로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한국해외인프라도시개발지원공사(KIND) 등 공공기관과 우리 수출·물류기업이 하나의 'K-원 팀'으로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와 다변화가 절실한 시점인 만큼, 공공이 앞장서 우리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뒷받침하겠다는 포부다.
원재철 한국국제물류협회 회장이 ‘해외 항만·물류사업 진출 지원 세미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이어 축사에 나선 원재철 한국국제물류협회 회장은 항만·물류산업이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핵심 분야임을 전제하며, 현행 정책의 한계를 지적했다. 현재 해양수산부,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등으로 파편화된 물류 정책을 조율할 국무총리 산하 '물류혁신위원회' 신설 등 통합 컨트롤타워의 필요성을 촉구했다.
특히 원 회장은 "물류인들이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 시절 한진해운 파산"이라며 “당시 롱비치 등 해외 물류거점이 유지됐다면, 지금의 공급망 위기에 훨씬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 4개국 물류거점 공개…올해 베트남·동유럽 영토 확장
최준우 부산항만공사 해외사업부장이 ‘해외 항만·물류사업 진출 지원 세미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최준우 부산항만공사 해외사업부장은 그간 BPA가 구축해온 'K-물류영토'의 현황과 비전을 공개했다. 연간 2488만 TEU를 처리하는 세계 2위 환적 거점이자 국내 컨테이너 화물의 77%를 책임지는 부산항의 위상을 바탕으로, 이제는 바다 너머 현지 배후 물류망까지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다.
해외사업 현황도 구체화됐다. 지난 2022년 1월 네덜란드 로테르담 물류센터(3만㎡)를 시작으로, 같은 해 6월 스페인 바르셀로나(6500㎡)에 연이어 거점을 마련했다. 특히 작년 9월에는 미국 LA·롱비치(약 8514㎡)와 인도네시아 동자바 프로볼링고(2만3801㎡)에 물류센터를 잇달아 개소하며 미주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했다.
또 BPA의 '제안 공모제도'도 소개됐다. 민간 기업이 사업을 제안하면 BPA가 적정성 평가, 타당성 조사, 해사리스크관리위원회 심의, 정부 승인 등을 거쳐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구조다. 공공의 신인도와 민간의 현장 노하우를 결합한 이 제도는, 국내 중소 물류기업이 해외 시장에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공식 창구다.
최준우 부장은 "올해는 동남아시아와 동유럽을 대상으로 새로운 물류 거점 확보에 나설 예정”이라며 “지난해 베트남과 동유럽 사업을 제안 공모제도를 통해 발굴했고, 올해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아울러 2040년 완공을 목표로 12조원이 투입되는 ‘진해신항’ 개발도 올해부터 본궤도에 오르는 만큼, 안팎을 잇는 거대 물류 체인이 완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 틱톡·아마존이 바꾼 미국 물류…공급망 리스크, 데이터로 극복
레오 정 KJNB 부사장이 ‘해외 항만·물류사업 진출 지원 세미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두 번째 세션에서는 BPA와 주성씨앤에어의 합작법인 ‘KJNB’를 통해 미국 현장 물류의 실상이 전해졌다. 레오 정(Leo Jeong) KJNB 트랜스포트 부사장(Vice President)은 급변하는 미국 이커머스 지형을 위기의 핵심으로 꼽았다. 기존 아마존(Amazon) 중심의 시장이 틱톡(TikTok) 등 소셜 커머스로 급격히 이동하며, 인플루언서 마케팅 한 번에 주문량이 폭발적으로 치솟는 ‘예측 불가능한 시대’가 열렸다는 분석이다.
정 부사장은 “현지에 재고가 없는 상태에서는 이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며 “창고 전략, 마케팅 전략, 물류 전략을 함께 세우는 것이 빠른 수익 창출의 길"이라고 짚었다. KJNB는 지난 2024년 9월 개장식을 마치며 오전 주문은 당일 오후 즉시 출고, 오후 1시 이후 주문은 익일 오전 출고하는 체계를 갖췄다.
또 디지털 피킹 시스템(DPS), 로커스(Locus) 자율이동로봇(AMR) 피킹, 익스텐시브(Extensiv) 창고관리시스템(WMS) 등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해 K-뷰티·K-푸드 등 소비재를 FedEx·UPS·DHL·USPS 등 다양한 라스트마일 캐리어와 연동해 미국 전역으로 배송한다.
이준원 삼성SDS 그룹장이 ‘해외 항만·물류사업 진출 지원 세미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이어 발표에 나선 이준원 삼성SDS 그룹장은 글로벌 공급망 변동성을 극복할 ‘디지털 무기’를 제시했다. 그는 “물류는 선사·포워더·화주·세관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얽혀 데이터를 통합하기 어렵고, 비정형 데이터 비중이 높아 AI·GenAI를 활용한 데이터 통합이 필수다”고 말했다.
삼성SDS가 운영 중인 통합 물류 플랫폼 ‘첼로 스퀘어(Cello Square)’는 실시간 운송 추적, 빅데이터 분석, 경로 최적화라는 세 축으로 공급망 가시성을 확보하고 있다. BPA의 네덜란드 로테르담 물류센터(Zone B)에도 이 시스템이 적용됐다. 항만 혼잡도 실시간 맵, 포트 스킵(Port Skip) 리스크 감지, AI 기반 예측 도착예정시간(ETA) 등 해상운송 특화 기능이 탑재됐다.
삼성SDS는 전 세계 36개국 55개 거점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우리 기업의 공급망 가시성과의사결정 속도를 높이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 자금부터 지분 투자까지…공공기관 지원 총공세
세 번째 세션에서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중진공),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한국해외인프라도시개발지원공사(KIND) 등 주요 공공기관 관계자들이 무대에 올라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지원책을 꺼내 들었다.
조성훈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팀장이 ‘해외 항만·물류사업 진출 지원 세미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조성훈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팀장은 기업들의 3대 애로사항인 '물류비·선적·유동성'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중진공은 올해 1502억원 규모의 수출바우처와 5000억원의 직접 융자 자금을 투입한다. 특히 오는 4월 BPA의 해외 4개 물류센터 이용 기업에 물류비를 직접 지원하는 신규 사업을 공고한다. 또 중동 사태 등 예기치 못한 타격을 입은 기업을 위해 2500억원 규모의 긴급경영안전자금도 가동 중이다.
김동환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센터장이 ‘해외 항만·물류사업 진출 지원 세미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김동환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센터장은 "잘 보내는 것이 곧 경쟁력인 시대"라며 역발상을 주문했다. KMI가 8년째 전담 중인 ‘해외 물류시장 개척 지원 사업’은 해외 시장 조사 및 컨설팅 비용의 50%(최대 5000만원)를 지원한다. 이는 이번달 20일까지 모집 중이며 과거 판토스, 대한통운 등 주요 물류사들도 이 사업을 거쳐 해외 거점의 타당성을 검증하며 안착한 바 있다.
이승환 한국해외인프라도시개발지원공사 실장이 ‘해외 항만·물류사업 진출 지원 세미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이승환 한국해외인프라도시개발지원공사 실장은 단순 대출이 아닌 '지분 투자(Equity)'라는 파격적인 카드를 제시했다. KIND는 창고 건설 시 공동 투자자로 참여해 기업과 리스크를 공유하는 전략을 취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뚫고 성공한 폴란드 카토비체 물류센터가 대표적이다. 그는 성과를 함께 나누는 ‘바이 앤 홀드’ 전략으로 우리 기업의 인프라 확보를 끝까지 돕겠다고 약속했다.
◆ 글로벌 시험대…위기를 기회로 바꿀 물류 주권 확보
부산시 중구에 위치한 부산항만공사 사옥. [사진=부산항만공사]
중동 전쟁, 미·중 무역 분쟁, 글로벌 해운동맹 재편까지, 이날 행사장을 관통한 키워드는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했다. 이제 공급망은 개별 기업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부산항만공사가 제안한 ‘K-원 팀’은 구조적 위기에 대한 대한민국 물류업계의 응답이다.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 BPA는 올해 베트남과 동유럽을 잇는 신규 물류 거점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각 기관이 독립적으로 운영하던 지원 체계가 BPA의 해외 거점을 허브 삼아 하나로 묶일 때, ‘K-원 팀’은 단순한 구호를 넘어 강력한 실행력을 갖춘 현실이 된다.
공급망이 곧 국가 경쟁력의 척도가 되는 시대, ‘K-물류’가 글로벌 시장의 거친 파도를 뚫고 우리 기업들의 든든한 항로를 열어줄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