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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뉴스] 서울 인사동길, 첨단 수도 한복판의 '빈티지 섬(island)'

-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살아있는 박물관'

- 일제강점기 미술품 유출 역사도

  • 기사등록 2021-06-23 22: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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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밸류뉴스=김도형 기자]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우리들의 삶 속 어딘가엔 사막의 우물과 같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


서울 안국전철역 6번 출구를 나와 인사동길 입구에 들어서면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문장을 떠올리게 된다.  


첨단으로 뒤덮인 서울이 '사막'이라면 우물은 '인사동길'이다. 일직선으로 뻗은 인사동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느 쪽으로든 들어서면 꼬불꼬불 골목길이 미로처럼 뻗어있고 고미술점, 골동품점, 공예품점, 지필방, 화랑들이 행인들을 맞이한다. 바둑판처럼 정리된 거리에 첨단 건물들로 채워진 서울 도심을 걷다가 마주치는 인사동길은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느낌을 준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을 행인들이 걷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인사동길이 이같은 모습을 본격적으로 갖추게 된 계기는 2002년 한국 최초의 문화지구 지정 덕분이다. 당시 정부는 문화거리를 양성하기 위해 인사동길을 한국 제1호 문화지구로 지정했다. 그러자 고미술점, 골동품점은 물론이고 전통 음식점과 전통찻집이 모여 들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인사동길의 기원은 조선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시대에는 왕실 그림 작업을 담당하는 관청인 도화서(圖畵署)가 위치해 예술로 명성을 떨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고, 당대의 김홍도, 신윤복 등의 화가들은 인사동에서 마음껏 도화지를 펼칠 수 있었다. 인사동에는 자연스레 화가들과 그림 도구를 사고파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필방과 한지 가게 등의 상점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사진=더밸류뉴스]

1910년대 일제강점기 시작으로 양반들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고, 이는 북촌의 상류층을 붕괴시켰다. 이를 기회로 여긴 일본인 골동품상들은 몰락한 양반들의 도자기, 고서화, 고가구 등의 골동품들을 인사동에서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이는 인사동이 골동품 거리로 유명세를 타는 계기가 됐고, 경복궁 자리에 조선총독부가 만들어진 후 근처에 위치한 인사동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의 고미술품들을 마구 수집하는 '슬픈 역사'도 함께 간직하게 됐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을 행인들이 걷고 있다. [사진=더밸류뉴스]

1960년대 후반부터 고미술, 화랑, 표구점 등이 생겨났고, 1970년부터는 최초의 상업적 화랑들이 인사동으로 모이면서 화랑가가 형성됐다. 인사동이 작가, 예술인, 미술 애호가들의 만남 장소가 되자 자연스레 전통차나 전통음식을 파는 식당이 많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인사동길은 600여년 동안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위치하며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생생하게 담고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moldaurang@thevalu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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