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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계 '별 중의 별'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병상에 누운지 6년만에 '영면'

  • 기사등록 2020-10-25 10: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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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밸류뉴스=조창용 기자]

한국 재계 '별 중의 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만 78세. 병상에 누운지 6년만에 영원히 잠들었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사진=더밸류뉴스(삼성그룹 제공)]이 회장은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해 자택에서 가장 가까운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가 서울 삼성의료원으로 이송돼 현재까지 이곳 VIP병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는 반 식물인간 상태에서 눈을 뜨고 감는 등의 반사적인 행동은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재활치료도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즈에서 뛰었던 야구선수 이승엽의 홈런 소식에 눈을 번쩍 뜨기도 했다고 한다. 그간 이 회장의 사망 루머도 주기적으로 증권가에 돌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관련 주식이 들썩이기도 했다.


2017년 11월 6일에는 한 종편 방송에서 이 회장이 영화를 보면서 간호사와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후 자가호흡을 하며 재활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25일 연합뉴스와 삼성그룹에 따르면, 고인은 선친인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 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건희 회장은 경남 의령 친가로 보내져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1947년 상경해 학교를 다녔고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부친의 엄명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어린시절 영화 감상과 애완견 기르기 등에 심취했고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사대부고 재학시절에는 레슬링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와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1970년대 이 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비며 하이테크 산업 진출을 모색했고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그룹 후계자로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삼성의 해외사업추진위원장을 맡아 유공 인수전에 뛰어들었으나 쓰라린 실패를 맛본 이 회장은 삼성 경영권을 승계하기까지 20여년간 우여곡절을 겪었다.


애초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형인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호암의 눈밖에 나면서 이 회장이 후계자로 낙점됐다.


1982년에는 양재대로에서 덤프트럭과 교통사고가 나 아찔한 순간을 넘기기도 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의 이건희 삼성 회장 [사진=더밸류뉴스(삼성전자 제공)]1987년 이병철 창업주 별세 이후 그룹회장에 취임한 고인은 1993년 신경영선언을 통해 초일류 삼성의 기틀을 닦았다.


이 회장은 삼성가 분할이 거의 완료된 뒤 삼성전자 임원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작심발언으로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품질경영, 질경영, 디자인경영 등으로 대도약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회장은 남다른 집념으로 삼성을 키웠다. 1987년 1조원이던 시가총액을 2012년 390조원대로 40배나 성장시켰고 총자산 500조원의 외형을 만들었다.


2006년 글로벌 TV시장에서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고, 애플을 따라잡고 스마트폰시장 1위를 달성했다. 메모리 반도체를 포함해 20여개 품목의 글로벌 1위를 일궈냈다.


이 회장은 1987년 46세의 나이에 회장에 취임할 당시부터 '초일류기업'을 꿈꿨다. 그는 2014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이 꿈을 향해 질주했다.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사업을 밀고 나가는 집념이나 추진력은 주변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가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선대 회장의 추진력에 더해 정밀한 지식과 글로벌 시각을 갖췄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첫발을 내디딘 반도체에 대한 투자 결정 과정이 대표적이다. 삼성 안에서 반도체 진출을 처음 꺼낸 게 이 회장이다. 호암마저 위험이 크다며 결정을 미루자, 이 회장은 사비를 털어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특히 이 회장은 전자·반도체 분야에서는 엔지니어 수준의 전문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 전세계 반도체 업계는 기술적 난관에 부닥쳤다. 4M D램의 엄청나게 늘어난 용량을 담을 수 있는 칩 설계 기술을 놓고 고민에 휩싸였다. 미국이나 일본 기업들은 그때까지 칩을 아래로 파고들어 가는 트렌치 방식을 고수했지만, 이 회장은 집적도가 높아질수록 위로 쌓는 게 유리할 것이라며 스택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후 삼성은 스택 방식을 기반으로 64M D램은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이 회장은 이후 삼성을 반도체를 시작으로 휴대폰과 TV 시장에서 세계 1위에 올려놨다. 이 회장은 끊임없는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는 이건희식 경영스타일을 앞세워 삼성은 33년 전 꿈꿨던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뉴욕타임스(NYT)가 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별세 소식을 타전했다.  [사진=더밸류뉴스(NYT 보도화면 캡처)]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각국의 주요 외신도 이를 긴급 뉴스로 보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삼성을 스마트폰, 텔레비전, 컴퓨터 칩 분야의 글로벌 거인으로 만들었지만 한국의 전형적인 대형 기업인들처럼 두 차례 유죄를 선고 받고 사면도 두 차례 받은 이건희 회장이 78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숨을 거뒀다"고 타전했다.


NYT는 특히 이 회장이 1966년 삼성 계열사였던 동양방송을 통해 입사한 기록부터 1987년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로부터 그룹을 물려받아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스토리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또 삼성 측이 이날 "그와 함께한 여정과 모든 기억에 감사할 것"이라고 밝힌 성명을 소개하기도 했다.


AP통신은 "조그만 TV 제조사를 전 세계 가전제품 업계의 거물로 변모시킨 이건희 회장이 78세로 별세했다"며 "이 회장이 부친으로부터 지배권을 물려받은 후 30여년 간 삼성은 스마트폰·텔레비전·메모리 칩을 만드는 세계 최대 브랜드가 됐다"고 보도했다. 또 "이 회장의 리더십은 아시아에서 네 번째로 큰 한국 경제를 일구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줬다"고 했다.


한편,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008770]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


2020년 10월 25일 한국 재계 '별 중의 별'이 영면에 들었다.


creator20@thevalu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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